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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로 본 서양미술사 - 근대 이후의 개: 반려인의 마음을 다독이다

라라와복래 2018. 8. 16. 10:37

동물로 본 서양미술사

근대 이후의 개

반려인의 마음을 다독이다


브리턴 리비에르, <신뢰(Fidelity)>, 1869년, 캔버스에 유채, 80x115.5cm, 리버풀 워커아트갤러리


19세기를 지나면서 유럽은 도시 산업사회로 탈바꿈했고, 20세기는 도시화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가 보편화 되어가는 시기였다. 농촌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으러 대도시로 몰려들었고,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며 먹고 살았다. 사람들은 거대한 도시에서 낯선이들에게 둘러싸여 비좁은 집에서 살아야 했다.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함께 사는 동물은 감정을 나누는 친구이자 가족이 되었다. 더 이상 사랑스런 놀이대상(애완)이 아니라 함께 사는 반려동물로 개의 위치는 이동했다. 개들은 함께 사는 식구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팔을 다치고 무언가에 낙담하고 좌절한 반려인의 무릎에 고개를 얹고 바라보는 그림 속 개의 근심어린 눈빛은 저들이 나눈 지난 시간들이 어떠했을지를 일러준다. 충성과 신뢰의 동물인 개는, 이제 반려견으로서 반려인의 마음을 지켜준다. 진정한 보살핌은 보살핌을 받는 쪽과 하는 쪽 모두에게 깊은 충만감을 선사한다. 현대인과 개의 관계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외로운 고야의 개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개(Le Chien)>, 1820~23년, 캔버스에 유채, 131x79cm,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1746-1828)는 근대 회화가 도달하기 전에 활동한 스페인 화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대단히 근대적으로 느껴진다. 자신의 집 벽에 그렸던 <개>라는 작품을 보자. 그림 속 개는 머리만 등장하는데, 시선은 오른편 위쪽을 향하고 있다. 시선이 향하는 대상은 화면 밖에 있어 알 수 없으나, 반짝이는 개의 눈빛은 간절하다. 벽의 얼룩과 텅 빈 화면으로, 개의 처지가 늪이나 모래사막에 빠져 사라질 듯 위태롭다.

만약 저 벽이 개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그것은 외로움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에 따르면, 외로움(loneliness)은 혼자 있는 고통이고 고독(solitude)은 혼자 있는 즐거움이다. 외로움은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연유에서 비롯되는 비자발적 감정이고, 고독은 스스로 선택하는 감정이라 ‘나는 내 고독과 함께 있다’는 표현이 가능하다. 즉 (사람과 조직 등에게서) 버려졌다고 느낄 때, 우리는 외롭다. 개의 외로움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되지 못할 외로움의 원초적 질감(‘이것이 외로움이다’)을 대단히 강력하게 전달한다. 사람이 눈물을 흘릴 때보다, 동물이 울 때 인간은 슬픔을 더 크고 강하게 느낀다. 동물은 감정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편 이 작품은 말년의 고야 자신의 자화상 같기도 하고, 젊은 시절의 영광이 끝나고 더 이상 찾는 이 없는 노년에 한번쯤 갖게 된다는 지난 삶에 대한 상념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듯도 하다. 아주 단순한 그림인데 보고 또 봐도 무어라 단정지을 수 없는 감정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쉬운 단어로 빚어낸 깊은 통찰의 시(詩) 같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친구


브리턴 리비에르, <공감(Sympathy)>, 1878년, 캔버스에 유채, 121.7x101.5cm, 런던 테이트브리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는 후기인상파의 영향으로 아방가르드 스타일이 대거 등장하면서, 창작자와 감상자의 거리가 서서히 멀어지게 되었다. 많은 평론가들은 그 간극을 메우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모두를 위한 예술과 소수를 위한 예술을 둘러싼 논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역사에 이름이 남은 화가와 당대의 사랑을 받은 경우가 불일치하는 몇몇 경우도 여기에 기인할 것이다. 브리턴 리비에르(Briton Rivière, 1840-1920)가 그린 <공감>은 누구나 쉽게 보고 마음에 남는 그림이라 지금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다. 대중들은 보기 편한 그림을 선호한다.

계단에 앉아 근심어린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는 일곱 살 남짓한 소녀에게 개는 몸을 기대어 온기를 나누고 있다. 아마도 소녀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없는 고민과 근심이 있는 듯하다. 포인터 종으로 보이는 개는 소녀의 울적한 기분을 오롯이 느끼고, 스르륵 다가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소녀의 곁을 채우고 있다. 진실된 공감보다 큰 위로는 없다. 말로는 할 수 없는 미묘한 심정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친구를 가진 사람은 행운아다.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브리턴 리비에르, <세인트 조지와 용(St. George and the Dragon)>, 1914년경. 출처: Daily Telegraph, King Albert's Book (London, 1914), p.56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영국 화가 브리턴 리비에르는 특히 동물 그림의 대가였다. <공감>처럼 동물과 사람의 모습, 그 관계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거나, 로마 황제의 근위대 장교였던 조지가 샘에 똬리를 틀고 앉아 제물과 처녀들을 잡아먹던 용을 사투 끝에 무찌른 영웅담 <세인트 조지와 용>처럼 신화적인 소재를 낭만적인 스타일로 완성했다.

동물은 아이의 상상력과 감수성 발달에 기여한다. 동물을 통해 아이는 사랑을 주고받는 능력을 향상시킨다. 동물은, 몸은 나이들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들 한다. 어린이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나이들 뿐이다. 그것이 개와 어린이가 서로를 좋아하는 이유가 아닐까.

“그(개)는 내게 있어서, 그 야수성과 거대함으로 나를 겁에 질리게 만드는 대자연(la grande Nature)과 나 사이의 연결부호(trait d’union)였다. 그의 덕으로 나는 자연에게서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특성들만을 읽어낼 수 있었다 (……) 그를 모방함으로써 나는 완전히 현존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에 관하여』, 청하, p.26-27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를 소비하는 인간에게 개는,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알려준다. 장 그르니에에 따르면 개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이름으로써 이 세상에서 숨쉬고 있음을 체감한다. 인간의 마음을 받아준 동물들이 아니었다면, 갖지 못했을 원초적 체험이다.


찰스 버턴 바버, <특별 변호인(A special pleader)>, 1893년, 캔버스에 유채, 97x127.6cm, 터치스톤즈 로치데일 아트 헤리티지센터

소녀의 충직한 변호견! 영국의 화가 찰스 버턴 바버(Charles Burton Barber, 1845-1894)가 그린 <특별 변호인>이라는 그림이다. 소녀는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을 인형도 던지고 벽에 기대서 울적거리고 있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인형이 서러움과 서운함을 극대화시킨다. 아마도 화면 밖에 있을 부모님께 꾸중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그 꾸중이 못내 억울한 모양이다. 개(콜리)는 소녀를 혼내는 누군가를 향해 애처롭게 바라본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혹은 ‘얘 잘못이 아니예요.’ 같은 청원의 눈빛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소녀의 머리카락과 원피스는 개의 털색깔과 닮아 있어 둘의 공통성을 강조한다. 개는 제가 마음을 준 사람을 대신해 싸워준다. 개를 키우는 집에서 있을 법한 상황을 화가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잘 녹여냈다.

소녀를 대신해 나서는 모습으로 보면, 개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어떤 꾸밈이나 비유가 없다. 그 단순성이 진심으로 다가와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것이 개에겐 불행, 인간에겐 다행이다. 진심에 배신으로 답하는 쪽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람보다 동물에 마음을 기대는 이들의 마음에 공감한다. 개는 충성심과 다정다감함으로 영원히 내 편이다. 재칼을 조상으로 하는 개들은 이기적이고 비겁하며 신의가 없으나, 이리(늑대)를 조상으로 하는 개들은 착하고 충실하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곁의 개들은 늑대의 후손일 것이다.

개는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인간에 의해 변형된 동물로서, 인간적 특성을 심어 놓은 동물이다. 인간과 더불어 살면서 개는 제 주인(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고 맞춰주는 능력을 습득한 게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 영장류보다 탁월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죽음도 갈라 놓지 못하는 우정


에드윈 랜지어, <늙은 양치기의 문상객(The old shepherd’s chief mourner)>, 1837년, 캔버스에 유채, 45.7x61cm,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

에드윈 랜지어(Edwin Henry Landseer, 1802-1873)는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동물 화가로 빅토리아 여왕의 총애를 받은 다양한 종의 개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자신의 특기를 살려 개에게 사람의 특징을 부여하여, 그림의 특별한 깊이와 감정을 표현해냈다.

함께 일하던 늙은 양치기가 죽자, 양치기 개 보더콜리가 문상을 왔다. 냄새로 제 주인을 알아채고, 관 속으로 녹아들려는 듯 제 몸을 관에 전부 내맡기고 있다. 늙은 양치기는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다가 죽었고, 이제 콜리만이 남아서 그곳을 지키고 있다. 헛간의 초라한 장례식 풍경이 콜리로 인해 애틋한 장면으로 바뀌었다. 며칠 후 관이 땅속에 묻히면, 묫자리를 오래토록 지킬 것이다. 죽음으로도 갈라 놓을 수없는 우정, 그것은 사랑이다.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습니다’라는 소리가 울리는 작품이다.

개와 함께 살 때 가장 놀라운 점 가운데 하나는 기다림의 능력이다. 한 자세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 인간은 기다림을 헛된 시간, 낭비하는 시간,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으로 간주하지만 동물들에게는 현재로서 가치 있는 시간이다. 과거-현재-미래의 완강한 인식틀에 갇힌 인간과 달리 동물들에게는 현재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듯 보인다. 개는 활동하기를 강력히 원하나, 그것을 누르고 기다린다. 그러니 그 기다림이란 얼마나 깊은 사랑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할까.

양치기의 개는 버림받은 채 홀로 있길 원치 않는다. 함께 밥을 먹고 사냥하고 산길을 걷던 제 동료가 다시 곁으로 오길 기다린다. 죽음은 끝나지 않을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마음은 양치기를 지나 우리에게 와닿는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은,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것까지 전한다. 함께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개와 인간은 생물학적 종(種)이 다르고, 피로 맺어진 가족도 아니지만, 피보다 더 진한 마음을 나누는 동지이자 가족이다.


브리턴 리비에르, <망자를 위한 기도(Requiescat)>, 1888년, 캔버스에 유채, 191.5x250.8cm, 아트 갤러리 오브 뉴 사우스 웨일즈

미국 동남부에 살았던 체로키족은 ‘개 부족(Dog Tribe)’라고도 불렸다. 그들에게는 인간과 세상 사이의 질서와 조화를 회복시키는 신성한 개가 있었다. 그 개는 도덕적 행동에 대한 심판을 내렸고 인류를 보호했으며, 죽음으로 가는 인간을 인도했다. 많은 고대사회에 개 무덤이 있는 이유가 이와 같다. 개가 인간과 더불어 살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동행(companion)이었다. 살아서 함께했던 개는 죽음까지 인간과 동행했다.1)

이렇듯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개는 인간의 요구에 맞게 능력을 키워 왔다. 사냥을 돕고, 양떼를 치고, 집에서 외부인을 감시하고 송로버섯을 찾고, 물건이 담긴 수레를 끌었다. 현대사회에 이르러 인간은 가장 가까이 있는 동물인 개에게 새로운 역할을 가르쳤다. 위험한 상황에서 사람을 구조하고, 맹인을 안내하고, 마약을 찾아내는 등, 사람을 돕거나 감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의 감정에 동화하여 위로와 위안을 주는 감정의 동반자로 길들였다. 이런 능력 덕분에 현재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반려견의 숫자는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 이른다. 원래 개는 ‘공생동물’2)이었으나, 지금은 반려동물로 자리 잡았다.

개는 즐겁다


자코모 발라, <가죽 목줄을 찬 강아지의 역동성(Dynamism of a dog on a leash)>, 1912년, 캔버스에 유채, 110x91cm, 올브라이트-녹스 아트갤러리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면서 그림 속 개의 묘사에 뚜렷한 차이가 생긴다. 20세기 초반은 예술에서 다양한 주의(입체파, 미래파, 초현실주의 등)들이 쏟아지던 때였고, 그림 속 개들의 모습도 현실의 닮음을 탈피하여 추상적으로 등장한다. 이탈리아 미래파의 대표 화가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 1871-1958)의 작품 속 검정 닥스훈트는 짧은 다리와 꼬리, 귀를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개와 주인은 은색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줄은 주인과 개의 걸음에 맞추어 앞뒤로 크게 움직이고 있다. 배경은 아이보리, 사람과 개는 모두 검정으로 처리하여 그림에서 속도와 움직임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마치 한 장의 필름 위에 연사를 한 사진과 같은 효과를 그림으로 구현했다. 개와 함께 하는 유쾌하고 경쾌한 산책길이다.

동물을 사랑하자


카를 라르손, <편안한 장소(Cosy corner)>, 1894년, 종이에 수채, 32x43cm, 스웨덴 국립박물관

스웨덴 국민화가로 불리는 카를 라르손(Carl Larsson, 1853-1919)의 그림은 요즘 각광받는 북유럽식 슬로라이프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다. 바로크 시대 종교화에서 고양이가 그러했듯이, 이 그림처럼 개가 평화롭게 잠든 이곳은 행복으로 가득한 집이다. 아이들과 한바탕 장난치고 놀고난 후 리트리버는 금세 잠이 들었다. 주변을 어지럽힌 담요와 신발, 책과 쿠션 등이 사실감과 더불어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잘 찍은 실내사진처럼 이야기가 담겨 있는 그림이다.

현대사회는 접속만 있고 첩촉은 없다. 개를 비롯한 반려동물을 쓰다듬고 온몸을 내어주어 끌어안으면 현대인의 불안과 초조는 손끝에서부터 스르륵 사라진다. 특히 개의 단순성에 물들어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장 그르니에 글로 결말을 대신한다.

“우리를 사랑하는 것들 혹은 우리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들을 사랑하자.” ―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에 관하여』, 청하, p.144

주석

1) 브라이언 페이건, 『위대한 공존』, 반니, p.64-75 참조

2) “어떤 생물이 다른 종류의 생물에게 물질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먹이를 얻고 보호를 받는 동물.” 피에르 슐츠, 『개가 주는 위안』, 초록나무, p.16

이동섭 (예술인문학자) 한양대학교 광고홍보학과 졸업. 파리 8대학 사진학과, 조형예술학부 석사(현대무용), 박사 준비과정(비디오아트), 박사(예술과 공연미학)를 마쳤다. 현재는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반 고흐 인생수업』, 『파리 로망스』, 『당신에게 러브레터』, 『뚱뚱해서 행복한 보테로』, 『뮤지컬 토크 2.0』, 『뮤지컬의 이해』, 『패션코리아, 세계를 움직이다』 등을 쓰고, 『파리 스케치북』,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번역하고, 『유럽 장인들의 아틀리에』의 사진을 찍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미술의 세계> 테마로 보는 미술> 동물로 본 서양미술사 201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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