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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피맛골 ‘빈대떡 신사’ 박수근, 술값은 유화물감

라라와복래 2018. 9. 9. 22:22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가는 대체로 곤궁하다. 요즘 유행하는 화려한 미식의 삶과는 인연이 멀다. 그러나 훌륭한 예술가들은 다른 방식의 미식을 즐긴다. 간소한 재료의 음식을 앞에 두고서 누구보다 뛰어난 섬세한 감각과 풍요로운 정신을 더하여 미감을 궁극으로 끌어올린다. 물질의 결핍을 감각과 정신, 그리고 즐거운 대화로 메우는 과정에서 교양이 더해지고 맑은 쾌감이 찾아오는 경지가 ‘예술가의 한 끼’다. 이 땅을 거쳐간 수많은 예술가가 나름의 한 끼 한 끼를 개척해 왔다. 그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해질녘 피맛골 ‘빈대떡 신사’ 박수근, 술값은 유화물감


국민화가 박수근 화백

어둑한 저녁이다. 서울 종로1가 피맛골에 두 사내가 나타났다. 한 사람은 수수한 옷차림의 화가고 한 사람은 옷맵시가 좋은 미술평론가다. 둘 다 잘생긴 미남자다. 화가는 나중에 국민화가로 추앙을 받게 되는 박수근(1914~1965), 평론가는 석도륜(1926~2011)이다.

두 사내는 언제나 그렇듯 빈대떡집을 향한다. 술은 막걸리다. 술값이 없으면 두툼한 징크화이트 튜브물감을 내놓았다. 현찰박치기가 아니고 외상이라는 증표였다. 그만큼 유화물감은 귀하고 비쌌다. 박수근에게는 후원자가 있었다. 미국의 밀러 부인이 가끔 그림값 대신으로 보내어 주는 물감이 넉넉했다. 화강암의 껍질을 연상케 하는 깊고 거친 질감의 마티에르를 위해선 기본색인 징크화이트가 많이 필요했다.

미국인 밀러 부인이 그림값 대신 물감 보내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개성과 배경을 가졌다. 석도륜은 일본 최고의 명문 구제 제1고교(도쿄대 예과)를 다녔다. 곧 닥칠 죽음을 예감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왕성한 독서를 했다는 1940년대의 구제 고교생이었다. 그는 부산 출생으로 속성은 이씨다. 4살 때 일본인 가정으로 보내어져 일본인 신분으로 자랐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학병으로 징집됐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그는 마침 해군 함정의 갑판 위에 서 있었다. 섬광이 번쩍했다. 가까이서 속삭이듯 대화를 나누던 동료가 눈앞에서 즉사했는데 자신은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죽음이 너무 간명했던 만큼 삶이 지독히도 허무했다.

며칠 후 해방이 되었고 그는 귀국했다. 생과 사의 궁극을 찾아 해인사를 찾아가 성철 스님의 제자가 됐다. 매일 얻어터지기만 했다. 그게 수련이었다. 환속하여 부산에서 잠시 머물다가 1960년쯤 상경하여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게 된다.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보통학교 졸업이 학력의 끝이다.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해 선전에 연이어 입선한다. 1940년 평양으로 가서 도청 사회과의 서기로 일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평양은 윤중식·박고석·이중섭·황염수·김병기 등 일본 유학파 화가들을 많이 배출했다. 박수근은 이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와 가까운 화가로는 함께 주호전 전시를 함께 했던 장리석·황유엽·최영림이 있었다.

해방되고 전쟁이 나자 월남했다. 동대문 근처 창신동에 정착했다. 전쟁 중에 그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안에 있었던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활을 꾸려 나갔다. 이때 미군들을 설득해 초상화를 주문하던 이가 훗날 소설가가 된 박완서다. 박완서의 소설 『나목』의 주인공 옥희도는 박수근에 다름 아니다.

“난 오랫동안 그림을 못 그렸어. 너무 오랫동안… 아직도 내가 화가인지 궁금할 만큼 오랫동안. 나는 내가 사람이 아니란 것보다 화가가 아닌 것이 더 두려워. 화가가 아닌 난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어.”(소설 『나목』)

전쟁이 끝나자 한국 미술계는 국전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여기서도 일본 유학파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박수근은 심사 과정에서 따돌림당하기 일쑤였다. 화가 권옥연(1923~2011)이 주변을 설득하여 탈락한 박수근의 그림을 도로 집어넣어 입선시킨 일도 있었다. 나중에는 결국 국전의 초대작가가 됐다.

진정한 화가가 아닌 것이 두려웠던 박수근은 노력했고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6년 반도화랑은 개관전으로 박수근, 김종하 2인전을 열었다.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로비 한쪽에 자리 잡은 반도화랑은 서울아트소사이어티의 리더인 실리아 짐머만 부인이 운영했다. 1959년이 되자 서양화가 이대원이 운영을 맡았다.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의 엘리트에다 팔방미인이었던 이대원은 너무 바빴다. 1961년 10대 소녀가 이 화랑에 취직했다. 그녀는 나중에 현대화랑을 세워 우리나라 미술계의 대표적 인물이 된 박명자다. 박명자가 화가들을 상대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녀가 박수근의 그림을 팔았다. 작품이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비주류였다.

서양의 미술을 따라 한 것이 일본의 근대미술이다. 그리고 일본의 근대미술을 배워서 익힌 것이 우리의 근대미술이다. 이중의 굴절을 거치면서 그림 그 자체가 처음부터 품고 있는 본질의 힘이 약화되는 건 자연스럽다. 이럴 땐 독학이 오히려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일본의 미술계 사정에 정통하고 안목이 높았던 석도륜에게는 어딘지 일본 근대미술을 닮은 듯한 유학파보다 박수근의 독학이 더 매력적이었다. 그 매력이 기독교 신자 박수근과 환속한 승려 석도륜을 묶어주었다. 미술학교를 안 다닌 박수근에게 미술계의 학우는 없었다. 대신 석도륜이라는 띠동갑 연하의 박학다식한 화우이자 식우가 생겼다.


박수근 화백이 창작열을 불태웠던 옛집 터에 들어섰던 빈대떡집도 문을 닫았다.

음식 그림 거의 없지만 굴비는 즐겨 그려

해방 이전 평양 시절, 박수근은 화우 장리석 등과 주말의 모란봉에서 그림을 그리다 저녁이 되면 빈대떡에 대포를 즐겼다. 서울 빈대떡보다 몇 배나 더 크고 두툼한 빈대떡이었다. 그 흐름이 서울에서 알게 된 석도륜과의 피맛골 빈대떡 순례로 이어졌다.

박수근은 인기작가였지만 주머니 사정은 늘 허전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그림 가격이 그리 높지 않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림이 팔리는 날만 쌀밥이고 나머지는 멀건 소금국의 수제비였다. 빈대떡에 막걸리는 성찬이었다.

체면과 실속의 균형을 잘 맞추는 서울사람들의 기질과 빈대떡은 잘 어울린다. 80년대 초반까지 안산의 봉원사 사하촌 오르막길 구멍가게에서 소일 삼아 빈대떡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다. 서울 빈대떡이라 하는데 크기가 손바닥 반도 안 되었다. 피맛골 빈대떡은 그보다는 두 배 정도 더 크고 광장시장 빈대떡은 평양 빈대떡처럼 엄청 크다.

조곤조곤한 말투의 서울사람들도 빈대떡 앞에서는 성량이 커진다. 삼겹살처럼 불판에 신경을 쓰느라 대화가 끊길 염려도 없다. 소리에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빈대떡집은 항상 시끄럽다. 소음을 돌파하고 영혼의 대화에 집중케 하는 힘은 열정뿐이다. 과묵한 열정의 박수근은 비약이 심한 석도륜의 다변을 잘 받아주었다. 박수근도 석도륜도 비주류의 삶이었다. 둘 다 미술학교와는 인연이 멀다. 학맥과 인맥으로 움직이던 화단의 중심에서 비켜난 삶이었다. 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시며 둘은 서로의 공감대를 확인하고 의기투합했다.

교보문고 뒤로 흐르는 중학천을 따라 열차집, 청일집 등 빈대떡집이 많았다. 종로가 재개발되면서 박수근과 석도륜이 다녔던 빈대떡 노포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창신동에서 동대문구 전농동으로 거처를 옮긴 박수근은 51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석도륜이 승려 생활의 경험을 살려 시신을 수습했다.

박수근은 당시 화가로서는 드물게 많은 수의 목판화 작품을 남겼다. 평양 시절의 그룹전이었던 주호회도 알고 보면 판화가로 요절한 목판화가 최지원을 기리는 모임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목판화가 무나가타 시코의 제자가 된 최영림도 그 멤버였다.

박수근은 말기에 경주에 가서 화강암 조형물과 와전을 판화 기법인 탁본과 프로타주로 종이에 떠내었다. 전각가, 서예가이기도 했던 석도륜 역시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탁본전을 열 만큼 그쪽에 일가견이 있었다. 박수근의 첫 번째 사후판화(작가가 생전에 제작한 원판으로 사후에 다시 찍은 판화)가 1974년 석도륜의 입회하에 아들 박성남과 딸 박인숙의 손에 의해 제작되어 충무로에 있던 백록화랑에서 전시됐다.


박수근 화백이 그린 ‘굴비’

박수근에게는 음식을 주제로 한 그림이 별로 없다. 굴비는 즐겨 그렸다. 반도화랑 시절 박명자는 박수근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박수근이 타계한 이듬해 그의 부인으로부터 결혼선물로 받은 작품이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굴비’다. 사정이 있어 몇 년 후 팔았는데 그때 가격은 2만5000원이었다. 나중에 되사니 2억5000만원이 되어 있었다. 박수근미술관이 2002년 화가의 고향인 양구에서 개관했는데 막상 원작은 한 점도 없었다. 너무 높은 가격이라 원작을 구입할 수가 없었던 것. 미술관의 딱한 사정을 안 박명자는 박수근미술관에 ‘굴비’를 기증했다. ‘굴비’는 돌고 돌아 국민화가 박수근을 사랑하는 대중들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박수근이 창작열을 불태웠던 창신동 393-16번지 옛집 터는 3년 전까지 빈대떡 가게가 영업했다. 죽어서도 빈대떡과의 인연이 이어졌다. 굴비도 좋지만 인연을 좇아 빈대떡 그림도 몇 점 남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져본다.

황인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출처 : 중앙SUNDAY 2018.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