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시/박인희 노래

라라와복래 2018. 9. 11. 02:10

세월이 가면

박인환 시

박인희 노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이 가사는 박인환의 시와 조금 다르지만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원시와 노래 가사가 눈에 띄게 다른 부분은 “사랑은 가도 과거는 남는 것”을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으로 바꾼 것과, 원시 맨 마지막 행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로 바꾸어 가사 마지막 행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시 후반부를 후렴처럼 반복했다.

이 노래는 6․25전쟁이 끝나고 3년쯤 뒤인 1956년 초봄에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환갑’이 넘은 오래된 노래인 셈. 이야기 버전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노래가 만들어지게 된 사연은 이렇다.

명동에 ‘경상도집’이라는 주점이 있었다. 예술인들이 들락날락하는 술집이었다. 어느 날 시인 박인환을 비롯해 극작가 이진섭, 언론인 송지영, 가수 나애심 등이 모여 술을 한잔 하고 있었다.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이 나애심에게 노래를 한 곡 부르라고 졸랐다. 나애심이 부를 노래가 없다고 꽁무니를 뺐다.

이때 박인환이 종이에 뭔가 끄적이더니 합석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세월이 가면’이란 제목이 붙은 시였다. 이 시를 읽고 샹송에 일가견이 있고 작곡도 할 줄 아는 팔방미인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였다. 나애심이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가락을 따라 불렀다. 뒤늦게 테너 임만섭이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렀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노랫소리에 끌려 발걸음을 멈추고 박수를 보냈다.

이 노래를 나애심이 처음 불렀다고도 하고 테너 임만섭이 처음 불렀다는 얘기도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라의 달밤’ 현인이 이 노래를 부른 최초의 가수이다. 그러나 당시엔 히트를 하지 못했다. 바이브레이션이 독특한 현인만의 창법이 애상조의 이 노래에는 걸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 오랫동안 잊혔던 이 노래를 1970년대에 통기타 가수인 박인희가 되살려 크게 히트를 쳤던 것이다. 노래는 어떤 가수가 어떤 창법으로 부르느냐가 매우 중요한데, 박인희의 청음(淸音)이 시의 정서와 잘 어울렸다고 하겠다.

이 시를 쓰던 그날 박인환의 표정이 어두웠다는데, 낮에 망우리에 있는 그의 첫사랑 여인의 묘소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자신의 시 ‘목마와 숙녀’를 좋아하던 여인과 피난통에 헤어졌다가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났다고 하면서 시를 썼다는 얘기도 있다.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을 쓴 일주일 뒤쯤 세상을 떠났다. 1956년 3월 20일 밤이었다. 세상 떠나기 사흘 전인 3월 17일에 시인 이상 추모의 밤이 있었는데 이날부터 매일 술을 마셨다. 그 당시 박인환은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다. 끼니를 거르기까지 했다는데, 그런 상태에서 술을 내리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세상을 떠난 그날도 술을 잔뜩 마시고 밤 8시 30분쯤 집에 들어온 후에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다가 심장마비로 별안간 숨을 거두었다. 부인 이정숙이 의사를 부르러 나간 사이였다. 향년 31세.


1948년 이른 봄 박인환과 이정숙은 많은 문우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박인환은 훤칠한 키에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용모였다. 친구와 영화, 스카치위스키와 조니워커를 좋아했다. 장례식 날 많은 문우들과 명동의 친구들이 왔다. 모윤숙이 시 낭독을 하는 가운데 많은 추억담과 오열이 식장을 가득 메웠다. 망우리 묘지로 가는 그의 관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관 속에 그가 좋아했던 조니워커와 카멜 담배를 넣어주고 흙을 덮었다.

박인환이 세상을 떠난 그해 추석에 가까운 선후배들이 무덤 앞에 아담한 비석을 세워주었다. 비석 앞면에는 ‘세월이 가면’ 첫 연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를 새겼다. 박인환은 태어나서 11살까지 강원도 인제에서 살았다. 2012년 10월 인제군은 고장 출신의 박인환 시인을 기리기 위해 ‘박인환문학관’을 건립하였다. ‘세월이 가면’은 세상 떠나기 불과 며칠 전에 쓴 시이기 때문에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1955)에는 없고, 20주기에 맞춰 나온 시집 『목마와 숙녀』(1976)에 실렸다.

정리 : 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