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호아킨 아그라소트 이 후안 - 19세기 스페인 시골 풍경을 기록하다

라라와복래 2018. 9. 17. 15:55

호아킨 아그라소트 이 후안

19세기 스페인 시골 풍경을 기록하다

레스까페(Rescape) 선동기

https://blog.naver.com/dkseon00/221349246231   2018.08.30

네이버 블로그 <레스까페>의 주인장인 선동기님은 블로그에 올린 글과 그림을 모아 <처음 만나는 그림>(아트북스, 2009)과 <아트 북스, 나를 위한 하루 그림>(2012), <그림 속 소녀의 웃음이 내 마음에>(을유문화사, 2017)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습니다. 전업 미술가가 아니면서도 ‘그림을 읽어주는 남자’ 선동기님은,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에 자신만의 상상을 더하게 함으로써 그림을 보다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오는 11월 중순부터 3주간 스페인과 포르투갈 배낭 여행이 확정된 후, 자주 스페인 화가들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여행 중 찾아갈 미술관에 어떤 화가들 작품이 있는지 알고 가면 동선을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거든요. ​오늘 소개할 호아킨 아그라소트 이 후안(Joaquín Agrasot y Juan, 1836-1919)도 그런 과정에서 만난 화가입니다.


항구 풍경 View of the Port, 68x105cm, oil on canvas, 1875

한가한 항구의 오후 풍경입니다. 나른함이 머물고 있는 선창에는 빈 통들이 뒹굴고 있고 큰 배의 돛대들은 마치 숲처럼 서 있습니다.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항구가 보여주는 애련함보다는 경쾌함이 더 많이 느껴지는 것은 스페인 특유의 맑은 햇빛 때문일까요?

아그라소트는 발렌시아 지방의 오리우엘라는 곳에서 제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성탄절 날 세례를 받았다고 하니까 태어나자마자 부모님 고생을 시킨 셈이 되었지만 성장 과정은 무난했던 것 같습니다.


두 친구 Two Friends, 100 x145cm, oil on canvas, 1866

염소를 끌고 들판으로 나왔던 소녀는 바위에 몸을 기대고 잠이 들었습니다. 남루한 옷과 신발 없이 다녔던 탓에 까맣게 변한 발을 보니 가난한 집의 아이겠지요. 먹은 것이 많지 않아서 힘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염소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잠든 소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친구를 버리고 갈 수 없었던 것일까요? 혹시 지금 소녀가 꿈을 꾸고 있다면, 그것만큼은 행복한 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향에서 공부를 시작한 아그라소트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알리칸테 주정부의 장학금을 받고 발렌시아에 있는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한 자료가 없어서 원래부터 그림에 대한 소질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화가의 길을 택한 것은 당시 스페인을 고려하면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구유 옆에 모여 든 시골 사람들 A group of country people gathered by a water trough, 27x34cm, watercolor

마을 우물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여행 중인 것처럼 보이는 부부가 맨 오른 쪽 끝에 서 있는데 당나귀에 앉은 여인의 모습이 좀 특이합니다. 뭔가 깔보는 듯합니다.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있는 여인의 눈빛이 조금 사나워 보이는데, 당나귀가 물을 마시고 있는 것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요? 사람들이 먹을 물을 긷고 있는 동안에 기다려도 되지 않느냐고 따지는 듯합니다. ​말 못하는 당나귀, 안쓰럽군요. 사람이 문제이지 짐승이 문제가 아니거든요.

이런 저런 내전으로 복잡했던 당시 스페인에서는 실력이 있는 화가에게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1860년,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아그라소트는 농업 박람회에 작품 여섯 점을 처음 출품합니다.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공식 데뷔 무대에서 확실한 성과를 거둡니다. 시작이 좋았지요.


​젊은 바쿠스 Young Bacchus, 85.5x145cm, oil on canvas, c.1872

포도나무의 신이자 황홀경의 신인 바쿠스의 뒷모습입니다. 포도주의 신이기도 하니까 지금 그는 취해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남자의 몸이지만 여인의 느낌도 느껴집니다. 하긴 신이니까 인간 세상의 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남자의 뒷모습도 이렇게 매력적일 수 있었군요. 그나저나 바쿠스 신의 까만 발바닥, 정말 신이 맞는가요? 아그라소트의 누드에 대한 솜씨를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됩니다.

1861년, 아그라소트는 또 한 번 장학금을 받게 됩니다. 이번에 그가 찾은 곳은 이탈리아 로마였습니다. 스페인 화가들 중에는 이탈리아로 유학을 간 경우가 많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유학은 아니었지만 왕의 명령으로 작품과 조각을 사러 로마를 방문하기도 했지요. ​그곳에서 그는 스페인 출신으로 로마에서 유학하던 화가들을 만납니다.


투우를 준비하며 Preparing for the Corrida, oil on canvas, 1878

투우가 곧 시작될 예정입니다. 관객들이 서둘러 입장을 하고 있고 오늘 투우에 참여할 투우사들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말을 타고 소를 흥분시키는 역할도 있고 창으로 소를 찌르는 역할도 있지요. 주인공이 마지막을 장식하지만 소 한 마리를 놓고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좀 치사한 경기처럼 보입니다. 그래도 들려오는 함성을 들으며 아레나 입구에서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긴장한 모습입니다.

로마 스페인 광장 앞에 ‘그레코’라는 오래된 카페가 있습니다. 작년 가을, 이곳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커피 맛도 좋지만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우아한 실내장식이 참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아그라소트는 이미 결성되어 있던 스페인 출신 화가들 모임에 가입을 합니다. 그리고 평생 친구인 마리아노 포르투니를 만나게 됩니다.


발렌시아의 과수원 사람들 Two Inhabitants of the Valencia Huerta, 44.5x 55.5cm, oil on canvas, 1880

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이 왔습니다. 붉은색 판초가 땅에 떨어진 것도 모르고 이야기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음료수와 담배를 권하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그런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 ​저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안 될 이야기가 있다면, 들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유화인데도 이렇게 정교하게 당시 의상을 묘사한 아그라소트의 솜씨가 돋보입니다.

마리아노 포르투니는 아그라소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로마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아그라소트는 스페인 국내 전시회에 작품을 꾸준히 출품합니다. 전시회를 통해 성공하겠다는 그의 결심에 의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이런 전시회를 통해 아그라소트는 상당한 호평을 얻게 됩니다. 성공하는 방법을 아는 것도 재주가 아닐까 싶습니다.


투우 중의 휴식 A Rest during the Bullfight, 47x31cm, watercolor, 1881

투우사는 옷차림으로 그가 맡은 역할을 알 수 있다고 하더군요. 붉은 망토를 입은 사람이 아마 오늘의 마지막을 장식할 선수처럼 보입니다. ​앞서 역할을 끝낸 사람들과 투우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는 것 같은데, 조금은 지친 모습들입니다. 흐릿하게 처리된 관객들에 비해 정확하고 화려하게 묘사된 투우사들의 표정이 또렷해서 마치 아웃 포커스로 처리된 사진을 보는 듯합니다. ​그런데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 투우를 시합이나 게임으로 불러도 되는 것일까요?

3년간 로마에서 머문 후 고향으로 돌아온 아그라소트는 그라나다에 있는 예술인촌에 자리를 잡습니다. 1864년 스페인 국가 전시회에서 동메달을 수상한 아그라소트는 1867년에는 은메달을 수상합니다. 그의 작품은 스페인 지역의 풍속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묘사한 풍속화와 오리엔탈 주제화, 누드화, 초상화 등 다양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을 두고 너무 상업적이라고 비난했지만 대중들은 그의 작품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역사화는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마르케스 델 두에로의 죽음 The Death of the Marqués del Duero, 378x513cm, oil on canvas, 1884

부대를 지휘하던 장군이 총에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 숨을 거둡니다. ​그의 이름은 마누엘 쿠티에레tm 드 라 콘자로 더 알려진 군인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그는 스페인으로 건너와 당시 왕정과 정통주의를 기치로 내세운 카를로스파에 맞선 공화파에 가담해 ​부대를 이끌었습니다. 그가 숨을 거둔 전투는 19세기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 막바지였기에 아쉬움이 더 컸지요. ​이 작품은 스페인 정부가 구입해 국회에 걸었을 정도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1873년, 엠마라는 여인과 결혼을 한 아그라소트는 다시 로마로 떠납니다. 아그라소트는 평생 여행을 자주 했는데, 지칠 줄 모르는 여행가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 절친 포르투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그라소트는 스페인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발렌시아에 자리를 잡고 남은 생을 보냅니다.


오달리스크 Odalisca, 94.5x65cm, oil on canvas, c.1890

터키 왕궁에서 시중을 들던 여인들은 유럽 화가들의 좋은 주제였습니다. 스페인의 경우 이슬람 문화가 더 오래 남아 있었고 바다 건너 모로코가 있었기에 오리엔탈 주제에 관심이 있었겠지요. 많은 화가들의 오달리스크는 다분히 성적으로 묘사된 것들이 대부분인데, ​아그라소토는 화려한 의상과 장식품으로 치장한 여인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느껴집니다. ​참 건강한 오달리스크입니다.

1876년에 필라델피아 박람회에서 예술 메달을 수상하고, 1888년에는 바르셀로나 국제 전시회에서 2등 메달을 수상한 아그라소트는 모교의 선생님으로, 발레시아와 마드리드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그리고 아카데미 전시 심사위원으로 왕성한 활동을 계속합니다. ​그가 꿈꾸었던 성공의 길을 걸어갔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스페인 풍경 Spanish scene

시골 농가 마당에서 열린 작은 잔치가 끝이 났습니다. 기타 연주를 하던 사람은 의자를 들고 일어서는데 아직 흥이 가시지 않은 여인들은 조금 더 놀았으면 하는 눈치입니다. 매일 이런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이왕 판을 벌렸을 때 조금 더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아그라소트의 풍속화는 밝고 명쾌해서 스페인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아그라소트는 여든둘의 나이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유화는 아니지만 첫눈에 스페인 화가라는 느낌을 주는 그의 화풍이 제게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프라도 미술관에도 그의 작품이 있다고 하니까 꼭 봐야 할 작품목록이 조금 더 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