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생상스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Saint-Saëns, Samson et Dalila)

라라와복래 2018. 10. 2. 20:58

Saint-Saëns, Samson et Dalila

생상스 ‘삼손과 델릴라’

Camille Saint-Saëns

1835-1921

Dalila: Ekaterina Semenchuk

Samson: Gregory Kunde

Le Grand Prêtre de Dagon: Roman Burdenko

Abimélech: Mikhail Petrenko

Mariinsky Theatre Chorus

Mariinsky Theatre Symphony Orchestra

Conductor: Valery Gergiev

Mariinsky Theatre, St. Petersburg

2016.05.25


Valery Gergiev/Mariinsky Opera 2016 - Saint-Saëns, Samson et Dalila


만 세 살에 작곡을 시작했다는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는 천재 중에서도 뛰어난 천재였지만, 칭찬이나 비판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길을 가는 작곡가였다고 합니다. 여든여섯 해를 살아가는 동안 그의 차분하고 여유 있는 태도는 언제나 그대로였다고 전해집니다.

생상스에게 붙는 직업의 이름은 무척 많습니다. 작곡가, 시인, 화가, 천문학자, 식물학자였던 그는 일종의 ‘파우스트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모르는 게 없는 박학다식한 존재로도 유명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바그너를 욕하고 있을 때 그는 바이로이트로 성지순례를 떠날 만큼 바그너 음악을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바그너의 음악이 온 유럽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는 오히려 그 숭배를 거둬들였죠.

생상스는 <동양 공주>, <은방울>, <헨리 8세> 등 오페라도 20여 편이나 작곡했지만, 현재까지 꾸준히 공연되는 작품은 <삼손과 델릴라>뿐입니다. 프랑스어 원제대로 읽으면 '상송과 달릴라'가 되겠지만, 여기서는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일반적 표기(외래어 표기법 규정)대로 '삼손과 델릴라'로 쓰겠습니다(성경에서는 ‘델릴라’를 ‘들릴라’로 표기). 그의 작품으로는 <동물의 사육제>, <교향곡 3번 c단조(‘오르간 교향곡’)>, <첼로 협주곡 1번 A단조> 등이 유명합니다. 생상스는 “감수성이 증가할수록 음악과 다른 예술들은 그 순수한 지위를 잃게 된다. 감정만을 추구하면 예술은 사라진다.”라고 말하며 이성적으로 음악을 창작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삼손은 구약성경 판관기(사사기) 16장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재판관입니다. 기원전 1천 년경, 팔레스타인 가자(Gaza) 지역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이 성경 이야기를 토대로 페르디낭 르메르(Ferdinand Lemaire)가 대본을 썼고, 오페라는 1877년 12월 2일 바이마르 대공(大公) 극장에서 초연했습니다.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1막

1막은 가자의 광장입니다. 블레셋(필리스틴, 필리스티아)의 지배하에 고통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에게 구원을 청하는 기도를 올립니다. 그러나 곧 불만에 가득 차, “우리들의 신은 귀머거리”라고 외칩니다. 민족의 지도자이자 용맹한 전사인 삼손(테너)이 나타나 “하느님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며 백성을 설득합니다.

블레셋의 장군 아비멜렉(베이스)이 군대를 이끌고 와 “노예들이 감히 떠든다”며 이스라엘의 신과 백성을 모욕하자, 삼손은 백성들을 격려하며 아비멜렉과 싸워 그를 쓰러뜨립니다. 블레셋 병사들은 혼비백산해 달아납니다. 이스라엘 현자(베이스)가 삼손을 축복하며 이스라엘인들에게 출정을 명합니다.

한편, 한때 삼손과 연인이었던 델릴라는 블레셋 처녀들과 함께 들판을 거닐며 봄을 노래합니다. 델릴라는 삼손에게 승전을 축하하러 왔다면서 그를 유혹합니다. 현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델릴라의 매혹적인 모습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2막

2막은 소렉 골짜기에 있는 델릴라의 집에서 시작됩니다. 삼손의 냉정한 태도에 마음이 상한 델릴라는 복수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대제사장(베이스)이 델릴라를 찾아와 삼손에 대한 증오를 더욱 타오르게 하면서, 삼손을 유혹하는 데 성공하면 금은보화를 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델릴라는 보상을 거절하고, 오로지 자신의 복수를 위해 삼손을 블레셋 대제사장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합니다.

천둥번개가 치는 밤, 감미로운 유혹을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었던 삼손은 델릴라를 찾아옵니다. 델릴라는 격정적인 사랑을 고백하며 삼손을 유혹하고, 삼손은 마침내 자기 힘의 원천이 바로 긴 머리카락이라는 중대한 비밀을 알려줍니다.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Mon cœur s'ouvre à ta voix)’라는 메조소프라노의 매혹적인 아리아가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델릴라는 잠든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힘을 잃은 그를 대제사장과 병사들에게 넘깁니다. ▶잠든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델릴라. 세실 B. 데밀 감독의 영화 <삼손과 델릴라>(1949)의 한 장면.

3막

3막은 가자의 감옥을 배경으로 합니다. 삼손과 함께 다시 블레셋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은 감옥 앞에서 삼손을 맹렬하게 비난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눈을 멀게 한 뒤 그를 사슬에 묶어 연자방아를 돌리게 하죠. 삼손은 민족 지도자의 사명을 지닌 자신이 하느님 앞에 저지른 죄를 깊이 뉘우치며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달라고 하느님에게 기도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승전을 축하하며 다곤 신전 앞에서 바카날 축제(술의 신 바쿠스를 찬미하는 광란의 축제)를 벌입니다. 이들은 삼손을 끌어내 놓고 다곤 신을 숭배할 것을 강요하고, 델릴라는 백성들 앞에서 삼손을 모욕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삼손은 소년에게 자신을 신전 기둥이 있는 쪽으로 이끌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신전을 받치고 있는 두 기둥 사이에 선 삼손은 하느님에게 마지막으로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는 맨손으로 신전 기둥을 밀어 다곤 신전을 무너뜨립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모두 거대한 기둥들에 깔려 죽게 됩니다.

“Mon coeur s'ouvre à ta voix”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Elīna Garanča, mezzo-soprano

Marco Armiliato, conductor

Orquesta sinfónica de Baden-Baden y Friburgo

Ópera-Gala en Baden-Baden, 2007

성경 속 안하무인이 아닌 사색적 주인공 삼손

생상스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삼손은 성경의 삼손과 어떻게 다를까요? 구약성경 판관기(사사기) 13-16장에는 삼손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작은 태양’, ‘한 줄기 빛’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삼손은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블레셋 여인들에게 매혹당합니다. 처음에 결혼하려던 블레셋 처녀에게 배신을 당하고 1천 명 이상의 블레셋 사람들을 당나귀 턱뼈로 처 죽인 삼손은 그 뒤로도 가자의 매춘 여성을 찾아 드나들다가, 결국은 소렉 골짜기의 처녀 델릴라를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성경의 삼손은 20년간 이스라엘의 지도자이자 재판관이었던 인물이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거칠고 폭력적이며 조급한 사람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오페라 속의 삼손은 완전히 다른 성격입니다. 세실 B. 데밀 감독의 영화 <삼손과 델릴라>에서는 삼손이 혈기 방자한 젊은 청년으로 등장하지만, 오페라에서는 이스라엘을 20년간 이끈 판관답게 노련하고 사색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대본가 르메르는 성경의 삼손을 토대로 하긴 했지만, 이 이야기를 희곡 작품으로 만든 볼테르의 <삼손>에 크게 기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볼테르는 많은 희곡을 쓴 작가로도 유명한데요,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삼손을 섬세하고 신중하며 끝없이 고뇌하는 민족의 지도자로 그렸습니다. 무대예술에서는 관객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주인공이 필요한데, 성경에 나오는 ‘안하무인’ 삼손을 연극이나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삼는다면 관객의 공감을 충분히 얻지 못할 것 같아서일 것입니다.

루벤스, 렘브란트를 비롯해 많은 화가들은 델릴라가 삼손의 머리를 자르는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루벤스의 그림에서는 델릴라의 붉은 치마폭이 눈을 사로잡고, 렘브란트의 작품에서는 명암의 극명한 대비가 인상적이죠. 오페라에서는 삼손보다는 델릴라에게 주어지는 서정적인 멜로디의 아리아들이 관객의 인기를 끌며 오페라의 집중도를 높여줍니다. 특히 메조소프라노 여주인공의 풍성하고 깊이 있는 음색은 금지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관능적 분위기를 창조했습니다.


렘브란트, <눈이 멀게 된 삼손>, 1636, 캔버스에 유채, 272x205cm, 슈타델 미술관

생상스는 원래 이 소재로 오라토리오를 작곡하려고 했으나 대본가 르메르가 오페라로 작곡하는 편이 낫다고 설득했고, 두 사람은 주인공 삼손의 첫 아리아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이미 1859년에 구상했습니다. 그러나 생상스가 두 번째 곡으로 2막에 나오는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를 작곡하기까지 8년의 세월이 흘러가버렸죠. 생상스는 사적인 형식의 살롱 음악회에서 이 곡과 그 밖의 몇 곡을 친구들에게 들려주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예의상 쳐주는 박수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얼마 후 2막 전체를 완성해 들려주었을 때도 반응은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1870년, 생상스의 오랜 친구 프란츠 리스트가 이 작품에 관심을 표하며 바이마르 극장에서 초연을 하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이 약속은 지켜질 수가 없었습니다. 1875년에는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콘체르탄테(무대장치와 의상 없이 이루어지는 공연) 형식으로 1막이 공연되었지만, 평론가들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아름다운 멜로디도 없고, 화성은 지나치게 대담하다는 것이 비평의 요점이었습니다.

하지만 리스트는 결국 자신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마침내 1877년에 바이마르에서 <삼손과 델릴라>를 초연하도록 도운 것입니다. 공연은 엄청난 성공이었습니다. 애초에 오라토리오로 기획한 이 작품은 오페라보다는 음악극(Musikdrama)의 성격이 강했고, 바그너의 음악극이 유럽을 지배하게 된 당시의 시대 상황에 잘 맞아떨어졌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음악저널(Journal de Musique)>은 “생상스는 독일 한복판에서 프랑스 악파의 깃발을 휘날렸다.”라고 적었습니다.

이 오페라에서 가장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기는 음악인 '바카날'은 생상스가 북아프리카에서 민속음악을 연구하며 보낸 시간의 결과입니다. 원시적인 생명력으로 충만한 이 곡의 강렬한 타악기 리듬이 없었다면 복잡한 화성을 지닌 <삼손과 델릴라>는 대중적으로 그만큼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Bacchanale” from ‘Saint-Saëns, Samson et Dalila’

Karen Keltner, conductor

San Diego Opera 2013

추천음반

1. 갈리나 오브라초바, 플라시도 도밍고, 레나토 브루손 등.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파리 오페라 오케스트라. 2005년 녹음, CD

2. 발트라우트 마이어, 플라시도 도밍고, 알랭 퐁다리 등. 정명훈 지휘,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1993년 녹음, CD

3. 올가 보로디나, 플라시도 도밍고, 세르게이 라이페르쿠스 등. 제임스 레바인 지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일라이자 모신스키 연출, 1998년 실황, DVD(한글 자막)

4. 율리아 게르체바, 호세 쿠라, 슈테판 슈톨 등. 요헴 혹슈텐바흐 지휘, 바덴 국립극장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호세 쿠라 연출, 2010년 실황, DVD


이용숙 (음악평론가) 이화여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및 음악학 수학, 서울대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연합뉴스 오페라 전문 객원기자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오페라, 행복한 중독>, <사랑과 죽음의 아리아> 등이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음악의 선율>클래식 명곡 명연주 2014.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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