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흰둥이 생각 - 손택수

라라와복래 2010. 12. 8. 16:59

 

 

흰둥이 생각

손택수

 

손을 내밀면 연하고 보드라운 혀로 손등이며 볼을 쓰윽, 쓱 핥아주며 간지럼을 태우던 흰둥이. 보신탕감으로 내다 팔아야겠다고, 어머니가 앓아누우신 아버지의 약봉지를 세던 밤. 나는 아무도 몰래 대문을 열고 나가 흰둥이 목에 걸린 쇠줄을 풀어주고 말았다. 어서 도망가라, 멀리 멀리, 자꾸 뒤돌아보는 녀석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아버지의 약값 때문에 밤새 가슴이 무거웠다. 다음 날 아침 멀리 달아났으리라 믿었던 흰둥이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돌아와서 그날따라 푸짐하게 나온 밥그릇을 바닥까지 다디달게 핥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어린 나는 그예 꾹 참고 있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흰둥이는 그런 나를 다만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는 것이었다. 개장수의 오토바이에 끌려가면서 쓰윽, 쓱 혀보다 더 축축히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고만 있는 것이었다.

 

 

 

 

 

 

 

손택수 시집

<나무의 수사학>

(실천문학사_2010.06.30)

 

 

손택수(孫宅洙)는 1970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할머니 댁 옆 냇가를 놀이터 삼아 물과 산과 더불어 자랐다. 취학통지서를 받고 부산으로 옮겼으나 학교생활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맹인들을 돌봐주는 곳에서 일할 때 리듬감 있는 글이 좋겠다 싶어 시를 읽어주게 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접하게 되었다. 이후 구두닦이 일을 하고 있는데, 건달 한명이 뒤통수를 후려치며 ‘똑바로 해라’라고 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대학입시를 준비했고 25살에 늦깎이로 대학에 입학했다. 경남대학교 국문학과, 부산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으로 등단했다.

 

시집

2003년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6년 목련 전차(창비)

2010년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