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공선옥 장편소설 <꽃 같은 시절>

라라와복래 2011. 5. 4. 13:46
 

 

공선옥 장편소설 <꽃 같은 시절>

창비

2011-04-11

 

꽃보다 용감한 '언니'들이 온다

2009년 만해문학상 수상 작가 공선옥의 신작 장편소설 <꽃 같은 시절>이 출간되었다. 2010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재한 작품을 단행본으로 묶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사회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대결함으로써 연재 시부터 큰 호응을 얻은 이 작품은 공선옥 문학 인생의 새로운 성취로 기대를 모은다.

  

소설은 횟집을 하다 재개발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철수와 영희 부부가 살 집을 찾아 시골마을에 흘러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복사꽃 환한 빛에 반해 어느 빈집에 우연히 들어선 부부는 집이 좋으면 그냥 살라는 인심 좋은 집주인의 허락으로 살 거처를 마련한다.


    “…꼭 우리집에서 살고 싶어요?”

    전화로 듣기에도 목소리가 선해서 우선 마음이 놓인다.

    “예, 꽃은 예쁜데 집이 외로워 보인다고, 집사람이 자꾸……”

    말을 해놓고 보니 아차, 실없는 소리를 했구나 하고 마음이 졸여졌다.

    “꽃이라고요? 우리집에 꽃이 있었던가앙? 하여간, 언제까지 살으실지는 몰라도 꽃이

    이뿌다며는, 살으야지요 뭐.”

    갑자기 눈물이 나올 뻔했다. 무슨 세상에 이런 집주인이 있나.

    “집세는……”

    “세는 무슨. 그쪽에서 세를 받으시야지.”

    “저희가요?”

    “집 지켜주잖애요.” (19~20쪽)

다시 한번 희망을 품고 시작한 시골생활이지만 이번에도 일이 이들의 뜻대로 풀리지는 않는다. 근처에 불법 쇄석공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순식간에 쇄석기 먼지와 소음으로 뒤덮인 것. 마을 사람들은 공장과 군청에 항의해보지만 힘없는 자들의 목소리는 누구도 귀기울여주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마을에 얼마 남지 않은 젊은이들은 돈을 받고 공장과 협상하겠다며 등을 돌리고, 노인들만이 남아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눈앞에 닥친 생계 걱정과 현실적인 고민들로 동참하기를 주저하던 영희는 그러나 그저 “조용히 살다 죽고 싶다”는 할머니들의 지극히 소박한 바람이 무시당하는 세상에 분노를 느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분노가 거세어질수록, 마음 한편으로는 분노보다 깊은 할머니들에 대한 애정이 샘솟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꽃 같은 시절>은 근래 보기 드물게, 지금 이 순간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한 지점을 정면 돌파한 작품이다. 우리 사회 약자들의 편에 서서 다양한 사회문제들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온 공선옥은 이번 작품에서도 성실한 취재와 올곧은 고집으로 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투쟁 현장을 거침없이 써내려간다. 하지만 이번 소설이 정말 다른 것은 ‘취재’라기보다 ‘생활’에 가까운 작품과 작가 본인의 밀착에 있다. 군데군데 코끝을 시큰하게 만드는 애틋한 문장들을 굽이돌아 결말에서 맞닥뜨리는 가슴 찡한 감동은 무엇보다 작가 자신이 할머니들과 함께 살아냈기에, 살아버렸기에 가능한 것이다. 자칫 소설의 완결성을 해칠 수도 있는 이러한 전략이 공선옥 소설에서만큼은 오히려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력한 매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언니, 그게 그러니까 말야, 무엇을 반대한다고 하는 싸움이 유정면에만 있는 게 아냐.

    전국이 다 그래, 다. 내 말은 그러니까, 유정면 주민들의 투쟁이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란

    거지.”

    “그래, 그렇다고 쳐. 그러면, 특별하지 않으면 기사로 쓸 가치도 세상에 알릴 이유도

    없다는 거야, 뭐야?”

    “요는, 그러니까, 그런 시시콜콜한 동네 이야기까지 기삿거리로 다루기엔 대한민국이

    그리 한가한 나라가 아니란 말이지. 물불 안 가리잖아? 불만 해도 봐봐. 남대문에서,

    이천에서, 광화문에서, 용산에서. 물은 또 어디야? 당장에 사대강이 있네. 언니, 근데,

    사대강 중에 섬진강도 들어가나?”

    “섬진강은…… 아닌 것 같애.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인가?”

    “있는 곳이 남쪽이라면 영산강 쪽이야? 섬진강 쪽이야?”

    “아무 쪽도 아냐.”

    “으음, 그럼 뭐 시끄러울 일도 없겠네.” (92쪽)

이 작품의 섬세함은, 힘없는 사람들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무분별한 개발논리를 비판하면서도 그 비판의 목소리에 밀려 더 힘없는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되묻는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 물음은 아무리 작고 하찮은 싸움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고통 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다시 일깨운다.


작가의 이러한 약자에 대한 사려 깊은 감수성은 작품 속 ‘지렁이 울음소리’의 이미지로 환기된다. 이 소설에는 작중인물들이,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귀뚜라미 소리나 다름없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는 장면이 되풀이해서 등장한다. 이것은 그들이 힘 있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작은 소리의 귀함을 안다는 증거이며 작가 자신이 세계관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울면 지렁이 울음소리가 묻힐까봐 걱정하는 대목은 작고 보잘것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그들의 마음이야말로 실은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것에 닿아 있는지를 증명한다. 남성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지렁이 울음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설정도 퍽 흥미롭다.


어디선가 귀에 익은 지렁이 울음소리가 띠루띠루띠루루루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돌공장에서도 다갈다갈다갈 쿵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가만히 듣자 하니, 지렁이는 돌공장 소리에 결코 지지 않겠다는 듯, 간절하게, 줄기차게 울 태세였다. 철수가 그런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산을 내려간 것이 안타까웠으나 할 수 없었다. 가만히 귀기울여야 들리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철수의 귀에는 오직 돌공장 소리만 들릴 거였다. 이 세상에는 돌공장 소리 말고도 지렁이 울음소리도 있다는 것을, 철수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생각하며 영희는 감자밭에 몸을 엎드리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108쪽)

 

추천사

재개발, 철거, 투쟁 등 말만 들어도 뒷목이 뻣뻣해지는 단어들을 주물러, 물처럼 유연하고 풀처럼 생생하고 꽃처럼 아름다운 소설을 만들어낸 공선옥의 공력이 놀랍다. 분명 투쟁의 이야기는 패배로 끝났지만, 절망이나 허무함이 남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따사로움이 스멀스멀 퍼진다. 이승과 저승, 젊은 아낙과 할매들을 넘나들고, 낯모르는 이들이 피보다 진한 연대를 하며 그들은 서로에게 시가 되고 꽃이 된다. 핍진한 밑바닥 삶을 늘 애처롭고 막막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작가의 글이, 더욱 자유로워진 화법과 한결 풍부해진 해학을 선보여 봄날 한판 흐드러진 화전놀이에 참가한 느낌이다. 남들 보기엔 실패한 투쟁이지만, 그들에게는 그 투쟁이 바로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꽃놀이’다. 공선옥이 피워낸 ‘사람꽃’을 보러 가자. -임순례_영화감독


독자로 하여금 작가와 작중인물을 혼동하는 가장 초보적인 실수를 범하게 만드는 소설이 있다면, 아마도 이 땅에선 그녀의 작품이 첫 번째로 꼽힐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이 만든 인물의 삶을 직접 살아버리고 마는 탓이리라. 이번에도 그녀는 한번도 꽃 같은 시절을 누려본 적 없는 사람들 틈바구니로 곧장 걸어들어가, 그들의 간고한 생애를 그냥 살아버렸다. 그녀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뽐내지도 않은 채, 야물디야문 손으로 기록해버리기만 했다. 이것은 결코 책으로 가공된 꽃 이야기가 아니다. 온몸으로 돌가루를 뒤집어쓰며 꽃을 피운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작가 공선옥은 그들의 진실을 다시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바꿔놓았다. 이즈음 많고 많은 작가와 소설들이 곁에 있지만, 나에게 가장 ‘본래적인’ 소설과 가장 ‘근본적인’ 작가를 꼽으라면, 바로 이 소설, 바로 이 작가일 것이다. -이기호_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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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재했던 장편 <꽃 같은 시절>을 낸 소설가 공선옥(48)에게 전화를 걸었다. 먼저 흐벅진 전라도 사투리가 날아든다. “으매, 그 복잡한 서울 사느라고 애쓰요잉. 여기나 거기나 살기 팍팍한 건 매 한 가지이지라잉. 몸 둘 데도 맘 둘 데도 없는 세상 아니겠소? 저도 세상을 어찌 살아야할지 자꾸 헷갈리는구먼요. 그래도 봄이라고 속절없이 꽃은 피었응께 어쩌겄소.”


 

소설은 돌가루를 뒤집어쓴 채 꽃을 피운 사람들의 이야기다. 근자들어 도통 공선옥을 볼 수 없다했더니 광주광역시 지산동에 둥지를 틀고 그 꽃을 피운 사람들과 함께 3년을 살았던 모양이다. 소설 속에 작가로 등장하는 해정이란 인물을 공선옥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해정은 출판사와 장편을 계약한 뒤 글 쓸 장소를 물색하던 중 대학 동창의 소개로 전남 순양군 진평리의 빈 집에 살기 시작한다. 물론 순양군 진평리는 가공의 장소다. 거기서 만난 영희라는 인물도 도시철거민 출신으로 역시 진평리의 허름한 집에 찾아든 여인네다. 그런데 영희가 남편 철수와 함께 진평리로 내려온 동기가 순전히 꽃 때문이다.


“살 집을 찾아헤매던 그 봄날의 저녁참에, 마을 앞을 지나가는데 언덕 위에 선 집에서 번져나오는 복사꽃의 분홍빛이 먼 데서도 자기를 부르는 것 같았다. 당신들도 살 집이 없어 외롭지요?”(16쪽)


집주인 무수골댁이 세상을 뜬 뒤 비어 있던 집에 서울에서 살고 있는 그 아들의 허락을 맡아 내려온 영희는 낯선 이에게 선뜻 집을 내준 집주인의 선의가 꿈만 같다. “꽃이라고요? 우리집에 꽃이 있었던가앙? 하여간, 언제까지 살으실지는 몰라도 꽃이 이뿌다며는, 살으야지요 뭐.”(19쪽)


영희는 인근에 들어선 불법 쇄석공장에서 날아오는 돌가루와 소음 때문에 고통을 받는 주민들의 추천으로 대책위원장을 맡게 된다. “깻잎에 돌가루가 박혀 입에서 싸그락싸그락 돌이 씹혔다. 논바닥에도 돌먼지가 쌓여 햇빛을 차단한 탓에 벼뿌리가 썩어갔다. 그런데도 여전히 시위대는 오합지졸의 꼴을 면치 못했다.”(57쪽)


시위대라고 해봐야 70대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쇄석공장이 이들을 업무방해죄로 고발하자 경찰서에 출두하게 된 할머니들은 이름 석자도 쓸 줄 모르는 순둥이들이다. 영희는 할머니들의 지극히 소박한 바람이 무시당하는 세상에 분노를 느낀다.


공선옥의 문체는 힘없는 사람들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무분별한 개발논리를 비판하면서도 그 비판의 목소리에 밀려 더 힘없는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되묻을 만큼 섬세하다. “내 속의 패배주의하고 싸우는 거야. 긍게, 내 속의 패배주의와 싸운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냐 하며는, 이기든 지든 결과에 상관없이 나를 억압하는 것과 싸운다는 것이여.”(146쪽)


소설을 읽다보면 지금은 거의 잊혀진 담양이나 곡성 쪽 사투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놀라게 된다. 전화로 듣는 공선옥의 목소리 또한 슬프고도 예뻤다. “요즘 농촌이 있는 줄 아쇼잉? 한번 내려와 보랑께요. 농촌도 다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으로 변해버렸지라우. 힘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을 간단하게 무시해버리는 현실, 그것이 대한민국 없는 자들의 설움이고 현실이지랑께요. 말해봤자 입만 아프겄지만 소설 속 할머니들처럼 세상살이가 아프다고 누가 대신 비명이라도 질러줘야 하지 않것쏘잉.” [국민일보 정철훈 선임기자 2011-04-13]


공선옥은 1963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1991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중편 ‘씨앗불’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에 따뜻한 관심을 표하는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소설집으로 <피어라 수선화> <내 생의 알리바이> <멋진 한세상> <명랑한 밤길>, 장편소설로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 <시절들> <수수밭으로 오세요> <붉은 포대기> 등이 있으며, 동화 <울지 마 샨티> 등을 썼다. 산문집으로는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 <행복한 만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