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간송 전형필> 이충렬 지음 l 김영사 펴냄 2010-05-03
원문 출처 : http://blog.ohmynews.com/arts/26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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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유출·수난의 민족문화유산을 지키다… ‘간송 전형필’
한글을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과 용례를 밝힌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 고려청자의 백미로 꼽히는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국보 68호), 조선 인물 풍속화의 진수인 신윤복의 ‘혜원풍속도’(국보 135호), 조선 세종 때 엮은 음운서인 ‘동국정운’(국보 71호)….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화재들이다. 간송미술관은 국보 12건, 보물 10건, 서울시 지정문화재 4건을 포함해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보유하고 있다. 소장 문화재 면면을 보면 사립미술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김정희 정선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신윤복 등 조선시대 주요 화가들의 서화, 서책, 고려 및 조선의 자기, 석탑과 불상 등 소장품 중에는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지 않았을 뿐 국보·보물급 문화재들이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가히 ‘민족 문화유산의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다.
간송미술관이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소장할 수 있었던 데는 한 선각자의 열정과 우리 문화재에 소명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작가 이충렬은 한반도의 문화재가 일본으로 무더기로 유출되던 일제강점기 때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낸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의 삶을 평전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방대한 자료 수집과 고증을 바탕으로 간송의 삶과 시대를 되살려냈다. 간송의 삶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기 위해 일부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간송의 생애와 시대 상황, 문화재의 가치 등을 왜곡하거나 훼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간송의 큰아들 전성우 간송미술관장의 공인과 감수까지 받았다.
책에는 간송이 전국 각지와 일본까지 오가며 문화재들을 수집하게 된 과정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1926년 휘문고보를 거쳐 29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전형필은 귀국 후 당대 최고 서예가이자 고서화 감식가였던 위창 오세창(1864∼1953)의 지도를 받아가며 30년대부터 우리 문화재 수집에 뛰어들었다. 스물넷에 물려받은 엄청난 유산을 바탕으로 서화와 서책, 도자기, 석조물 등 귀중한 문화재들을 사들였다. 가치가 있고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미술품은 값을 따지지 않았다.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은 당시 서울 기와집 20채 값에 해당하는 2만원에 사들였고, 일본에 유출됐던 신윤복의 풍속도 ‘혜원전신첩’은 2만5000원에 되사왔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영국 귀족 출신 변호사가 20년 가까이 모은 국보급이 포함된 고려청자 20점은 40만원에 매입해 국내로 들여왔다. 참기름병으로 쓰였던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재 난국초충문병’(국보 294호)은 1만5000원에, ‘훈민정음 해례본’은 1만원에 각각 사들였다.
그는 특히 일제 말기인 43년 경북 안동에서 사들인 훈민정음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일제가 한글을 탄압하던 시기여서 꼭꼭 숨겨뒀다 해방이 된 후에야 훈민정음을 공개한 그는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갈 때도 품속에 품고 다녔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어 지켰다.
간송이 수집한 문화재는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에 걸쳐 있다. 서화는 물론 조각과 공예 등 조형미술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간송미술관 소장품만으로 한국미술사를 서술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는 문화재 수집에 많은 재산을 들인데다 말년에 자신이 인수한 보성중고등학교의 빚을 갚느라 생활이 어려워 집과 땅을 팔았지만 소장품들은 끝까지 지켜냈다.
그가 38년 서울 성북동에 개관한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은 66년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 국내 대표적인 문화재 미술관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저자는 간송의 문화재 수집에 대해 “조선의 문화예술사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던 시기였기에 외롭고 어려운 길이었고, 일제가 흔적까지 지우려 했던 조선의 혼을 지키는 일이었기에 곤혹스러운 일도 겪어야 했다”면서 “그러나 간송 전형필은 허허 웃으며 그 길을 갔다”고 적었다.
책에는 우리 문화재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유물 수집에 매진해 온 선각자 간송의 열정과 사명감이 배어 있다. 또 간송 후손들의 협조를 얻어 구한 100여장의 귀한 문화재 도판 등이 실려 있어 문화유산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원문 출처 : 국민일보 라동철 기자 2010.05.06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679825&cp=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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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홀로 지킨 문화재, 그건 ‘조선 혼’
독보(獨步). 그는 독보의 길을 걸었다. 조선의 아름다움을 지킨 사람. 그의 삶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간송 전형필(1906~1962). 그는 일본제국주의 우산 아래 일본인들이 마구 반출해가던 우리 문화재를 이 땅에 남게 하려고, 온 재산을 썼다. 그의 온 삶을 그것에 걸었다. 큰부자였기에 가능했지만, 그저 일제하에서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
# 1. 1937년 2월 일본 도쿄의 한 숙소. 큰 승부를 앞두고 32살 청년 간송은 마음을 다잡았다. 영국인 골동품 수집가 존 개즈비가 20년간 조선·일본을 넘나들며 명품만을 골라 수집한 고려청자 20여 점을 일괄 처분한다는 소식에 지체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그였다. 원숭이형 연적(국보), 기린형 향로(국보) 등 그의 눈앞에 아름다운 고려청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6년을 기다린 승부였다.
사흘에 걸쳐 진행된 도쿄 협상은 가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됐다. 간송은 포기하지 않았다. 서울에 온 개즈비에게 박물관 보화각(간송미술관) 건설현장을 보여주었다. 일본인들에게 팔 수도 있었던 영국인 개즈비의 마음을 잡아챈 건 결국 조선의 청자들을 조선 땅에 두어야 한다는 전형필의 마음이다.
이 마지막 협상에서 개즈비가 간송에게서 본 것은 그가 그저 많은 유산을 상속받은 수집광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겼으면서도 제 나라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보존·전시하겠다는 한 인물이었다. 드디어 40만원에 낙찰!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이던 때였으니 400채 값. 당시 한·일 골동품 수집 사상 최대 규모 거래였다. 요즘 아파트 시세로 한 채당 3억원으로 셈하면, 한 점에 60억원, 20점에 1200억원을 낸 셈이다. 간송은 이를 위해 논 1만마지기를 팔았다.
#2. 1940년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운영하던 고서화점 한남서림에서 어문학자 김태준(1905~1949)에게서 놀라운 말을 들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진본이 있다는 거였다. 뛰어난 어문학자 김태준은 제자의 집안에서 진본을 확인하고는, 만날 때마다 훈민정음 타령을 하던 간송을 떠올렸다. 사회주의 조직 경성콤그룹의 일원이던 김태준은 그러나 곧 일제경찰에 검거되고 만다. 김태준이 병보석으로 석방된 건 2년 뒤인 1943년 여름. 일제가 한글 말살을 위해 조선어 학자들까지 잡아들인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로 세상에 알려진 김태준을 통해 <훈민정음>을 구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 간송은 그러나 김태준을 만난다.
“시국이 엄중하니 훈민정음의 존재는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습니다. 훗날 조선이 해방되면 세상에 내놓겠습니다.”
두 사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침내 전형필 앞에 놓인 <훈민정음>은 33장 1책의 목판본. 한글을 만든 원리와 용례를 상세하게 밝힌 ‘해례본’이었다. 간송은 <훈민정음>을 수집품 중 최고 보물로 여겼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고 했다.
청년 전형필과 훈민정음 해례본. 김영사 제공
재미작가 이충렬씨가 <간송 전형필>에 묘사한 두 장면이다. <간송 전형필>은 자신의 삶을 두고 글 한 줄 남기지 않았던 간송의 삶과 그의 문화재 수집 과정을 400쪽 분량에 형상화한 책이다. 소설 기법으로 담아낸 간송의 일대기인데, 간송이 오세창을 만날 때 탁본을 들고 갔다는 장면, 부친이 상중이라 <몽유도원도>를 놓치는 장면 등은 작가가 만든 허구다. 상상력을 보탰지만, 간송의 행적에 관한 글들과 증언, 신문·잡지 등을 뒤지는 세심한 고증으로 간송이 어떻게 산지사방으로 떠돌던 서화와 옛책의 국외 반출을 막았는지를 긴박감 있게 ‘복원’한다. 누구나 안다고들 하지만 기실은 잘 몰랐던 간송의 일생과 내면을 엿보는 책이다. 지은이가 그리는 전형필의 모습은 문화를 지키려는 배짱과 의지를 지닌 대담한 사람이다. 간송은 고서화와 골동이 조선의 자존심이기에 지키고자 했다고 책은 적는다. 간송이 이룬 일은 “조선이 해방되리라는 희망을 놓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간송은 1929년 스물넷에 서울과 경기·충청·황해도에 논 4만 마지기(800만 평)를 지닌 만석꾼 지주이자 미곡상으로 부를 쌓아온 전씨 집안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다. 그는 1938년 수집품들을 모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을 열었고 보성학교 등 교육사업에도 애썼다.
간송에겐 무엇보다 그와 함께 걸은 사람들이 있었다. 휘문고보 시절 고서를 모으는 데 탐닉하던 소년을 격려한 것은 외숙부였다. 외사촌 형인 월탄 박종화에게서는 역사를 배웠다. 우리 미술품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심중에 새기기 시작한 건 열렬한 민족의식의 소유자로 고보 시절 미술 교사 고희동 화백을 통해서다. 미곡상 가업을 잇기를 바라는 부친의 강권으로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전형필은 고희동에게서 “문화를 지키는 삶”의 방향타를 잡는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고서화 감식에 조예가 깊어 ‘당대의 감식안’으로 불렸던 위창 오세창(1864~1953)에게서는 미술품을 보는 안목을 배웠다. 스승 오세창은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묘사된다. 모으기만 할 게 아니라 후대에 전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는 오세창의 물음을 간송은 미술관 설립으로 현실화시켰다.
간송 홀로 지킨 문화재, 그건 ‘조선 혼’
간송이 남긴 것은 비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큰부자라는 수식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 미술사의 텃밭은 지금 모양새보다 협소했을 것이다. 그가 <훈민정음>을 지키지 않았다면 우리말 연구의 밑천은 지금보다 협착했을 것이다. 그가 스물다섯살 때부터 1945년 해방을 맞기까지 15년 동안 흩어져 떠돌던 문화재들을 모아 놓은 간송미술관 수장고는 한국 미술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이 미술관 수장품을 빼고는 우리 미술사를 온전히 쓸 수 없다고도 한다. 해방 뒤엔 누가 모아도 이 땅에 남을 것이라며 수집을 중단했던 그는 빚을 갚으려 동분서주하다 1962년 1월 쉰여섯의 나이에 쓰러졌다.
“문화 상속받은 후대가 마땅히 할 일”
■ 지은이와 함께 / 간송 삶 복원한 재미작가 이충렬씨
조선 제일의 수장가 간송 전형필이 수집한 우리 문화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말 근대까지 전 시대에 걸쳐 있다. 겸재, 현재, 단원, 혜원, 추사처럼 시대를 대표하는 조선의 서화는 물론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조각과 공예 등 조형미술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이원복 국립광주미술관장의 말을 빌리면 간송은 남다른 심미안의 소유자였다. 최고의 ‘고서화 감식안’이던 위창 오세창 등의 도움으로 고증을 거쳐 체계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했다. 간송미술관의 고서화는 수량에선 국립중앙박물관의 1만7천점에 못 미치지만, 그 질을 따지면 국내 미술관·박물관을 통틀어 최고라고 한다.
간송이 서른두살에 국내 첫 사립미술관으로 설립한 간송미술관은 1971년부터 해마다 5월과 10월에 두 차례 전시회를 연다. 이즈음이면 전국에서 미술 연구자들과 미술 애호가들이 이 미술관이 자리한 서울 성북동 자락으로 몰려든다. 이 미술관 수장고에서 꺼낸 한국 미술의 걸작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간송 전형필>을 쓴 재미작가 이충렬(56)씨도 그런 관람객 중 한 사람이었다. 1996년 5월 오랜 지기인 이원복 박물관장의 손에 이끌려 간송미술관 전시회를 처음 관람했다. 간송이 일본으로 반출된 것을 다시 사온 신윤복의 풍속화첩 <혜원전신첩>, 겸재의 <금강전도> 등을 보며 그는 숨이 멎을 듯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매년 한 차례 이상 귀국하여 간송전시회를 보았다.
2006년 간송 탄생 100주년전에서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국보급 보물 100점을 보는 눈호사를 하고는 결심했다고 한다. ‘제가 선생님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이 미술관 뒤뜰에 자리한 간송의 흉상 앞에서다.
“어떻게 그 먼 애리조나에서 (저의) 아버님 이야기를 쓸 생각을 하셨습니까?”
이충렬씨가 완성된 초고를 들고 지난해 말 간송의 유족을 찾아갔을 때 맏아들인 전성우 화백은 이렇게 물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허구가 들어 있음을 명기하는 조건으로 출판에 동의를 해주었다고 했다.
책 출간에 앞서 서울에 온 이씨는 5일 “간송이라는 넓고 큰 인물을 그리려다가 몇 번 포기할까도 했지만,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했다.
미국 애리조나에서 살고 있는 이씨는 1994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소설가이자 이미 <그림 애호가로 가는 길>이라는 책을 낸 바 있는 미술 애호가이다. 그 자신 미술품 수집가였기에 귀중한 미술품을 지키려 했던 간송의 마음에 조금은 더 다가설 수 있었다고도 했다. 그는 자료를 찾다가 어느 누구도 간송의 삶을 담은 책을 쓰지 않은 데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문화재란 민족의 얼과 혼입니다. 앞이 안 보이던 일제 식민지 시절에 문화재를 수집한 것은 그 얼과 혼을 간수하겠다는 생각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간송은 이런 마음으로 모았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요. 민족의 자존심, 학대받았던 조선사람들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 문화재를 지키는 일이었다고 생각했으리라고 믿습니다. 어려웠던 때 그 가치를 지키려 했던 흔치 않은 인물을 기억하는 것이 후손들이 할 일이라고 봅니다.”
[원문 출처 : 한겨레신문 글 허미경 기자, 사진 이종찬 선임기자 2010-05-10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197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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