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 이해인 수녀 산문집

라라와복래 2011. 4. 15. 18:50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지은이 이해인 l 그린이 황규백

샘터

2011-04-11


이해인 수녀의 맑고 고운 산문은 그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고 희망의 씨앗이 된다. 5년 만의 산문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연다. 이 책을 위해 글을 써주겠다는 약속을 뒤로 하고 지난 1월 작고한 박완서 작가가 손수 쓴 꽃무늬 편지가 눈에 들어온다. 이 편지로 서문을 대신한 수녀의 애잔한 마음이 먼저 전해진다.

 

    사랑하는 이해인 수녀님

    그리던 고향에 다녀가는 것처럼

    마음의 평화를 얻어 가지고 돌아갑니다.

    내년 이맘때도 이곳 식구들과 짜장면을

    (그때는 따뜻한) 같이 먹을 수 있기를,

    눈에 밟히던 꽃과 나무들이 다 그 자리에 있어

    다시 눈 맞출 수 있기를 기도하며 살겠습니다.

    당신은 고향의 당산나무입니다.

    내 생전에 당산나무가 시드는 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꼭 당신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보다는 오래 살아 주십시오.

    주여, 제 욕심을 불쌍히 여기소서.

    2010.4.16 박완서

소박하고 낮은 세상을 향해 한결같이 맑은 감성의 언어로 단정한 사랑을 전해온 이해인 수녀는 이번 산문집에서 특히 자신이 직접 몸으로 겪은 아픔과 마음으로 겪은 상실의 고통을 과장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 꽃이 진 자리에도, 상실을 경험한 빈자리에도 여전히 푸른 잎의 희망이 살아 있다고 역설한다. 그는 수도자로서, 시인으로서, 개인으로서의 삶과 사유를 글 갈피마다 편안하게 보여줌으로써 부족하고 상처 입은 보통 사람들을 위로하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치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번 산문집에는 세계적인 판화가 황규백 화가의 그림이 함께 실렸다. 정겨운 돌담, 작은 새 등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사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사람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내재된 정감을 일깨우는 작품들이 이해인 수녀의 글을 한층 더 깊이 있게 읽도록 이끈다. 또한 이해인 수녀가 월간 <샘터>에 2010년 한 해 동안 연재했던 ‘고운말 차림표’를 소책자로 만들어 독자에게 제공한다.

제1장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_ 일상의 나날들>에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과 사람, 계절의 변화와 기억 등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잡아낸 생각들을 이해인 수녀의 감성으로 버무려 감칠맛 나는 언어로 엮어 낸다.


꽃이 지고 나면/ 비로소 잎사귀가 보인다/ 잎 가장자리 모양도/ 잎맥의 모양도/ 꽃보다 아름다운/  시가 되어 살아온다// 둥글게 길쭉하게/ 뾰족하게 넓적하게// 내가 사귄 사람들의/ 서로 다른 얼굴이/ 나무 위에서 웃고 있다// 마주나기잎/ 어긋나기잎/ 돌려나기잎/ 무리지어나기잎// 내가 사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운명이/ 삶의 나무 위에 무성하다  - 이해인 ‘잎사귀 명상’ 전문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더 잘 보이듯이 누군가 내 곁을 떠나고 나면 그 사람의 빈자리가 더 크게 다가온다. 평소에 별로 친하지 않던 사람이라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크게 보인다.


우리가 한세상을 살면서 수없이 경험하는 만남과 이별을 잘 관리하는 지혜만 있다면 삶이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웬만한 일은 사랑으로 참아 넘기고,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마침내는 이해와 용서로 받아 안는 노력을 멈추지 않으면서 말이다. 서로의 다름을 비방하고 불평하기보다는 ‘이렇게 다를 수도 있음이 놀랍고 신기하네?!’ 하고 오히려 감사하고 감탄하면서 말이다.

(……)

나하고는 같지 않은 다른 사람의 개성이 정말 힘들고 견디기 어려울수록 나는 고요한 평상심을 지니고 그 다름을 아름다움으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한다. 꽃이 진 자리에 환히 웃고 있는 싱싱한 잎사귀들을 보듯이, 아픔을 견디고 익어 가는 고운 열매들을 보듯이...

-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에서


또한 법정 스님과 오랫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담은 ‘스님의 편지’에서는 다정한 미소를, 김용택 시인에게 보내는 ‘우리 집에 놀러오세요!’에서는 명랑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가 하면, ‘어머니를 기억하는 행복’에서는 어머니를 그리는 딸의 그리움이 읽는 이의 가슴에 엷은 슬픔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제2장 <어디엘 가도 네가 있네_ 우정일기>에는 이해인 수녀가 10여 년간 쓰고 지우며 쌓아 온 우정에 대한 단상 60여 편이 담겨 있다. 이해인 수녀 특유의 맑은 감성과 암 투병 중의 인간적인 마음을 투정하듯 위로받듯 오롯이 드러낸 단상의 행간들이 뭉클함을 불러낸다.

 

24

너에게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에 가는 길, 오늘은 비가 내리네. 너를 향한 동그란 그리움과 기도……. 멈추지 않는 나의 웃음을 어찌 알고 동그란 빗방울들이 봉투에 먼저 들어가 있네.

_동네 우체국에 가는 길은 늘 행복하다. 편지를 쓰는 일은 살아서 할 수 있는 아름답고 거룩한 소임이다. 때론 허름한 옷에 앞치마까지 두르고 간 적도 있는데 “수녀님이 정말로 글 쓰는 해인 수녀님 맞으시나요? 멀리 계시다고 여기던 분이 바로 앞에 계시니 참 신기하네요.” 우편물 점검하던 여직원이 웃으며 차 한 잔을 권했다.


36

네가 농사지어 보내 준 포도 잘 받았어. 큰 수술 이후 회복기의 금식을 깨고 과일 먹는 것이 허락됐을 적에 처음으로 내가 먹던 그 황홀한 포도 한 알의 맛! 그 맛은 나에게 지구 전체를 대표하는 살아 있음의 맛이었어. 그 맛을 기억하며 오늘도 너에 대한 고마움으로 포도 한 알을 입에 넣는다.


제3장 <사계절의 정원_ 수도원 일기>에는 이해인 수녀가 2010년 한 해 동안 수도원의 일상을 적어 내려간 일기가 담겨 있다. 치료의 고통을 견디는 힘든 시간들의 기록, 인사발령이나 죽음의 길로 떠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슬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는 일의 소소한 행복감 등 잔잔하면서도 명랑한 톤으로 담긴 수도원의 일상을 통해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살아 있는 호흡을 느끼게 된다.


알람 소리를 듣고도 제때에 일어나지 못한 날.

수단에서 선교하던 이태석 신부님이 오늘 새벽 선종하셨다고 한다. 1962년생의 아직 젊은 의사 신부님... 음악적 재능도 많아 아프리카 청소년들의 합주단도 만들고 순회공연도 하며 많은 이에게 기쁨이 되었던 신부님.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이 휴양 중일 적에 초췌해진 모습을 본 후 계속 기도해 왔는데... 수단어린이장학회 카페에 들어가서 추모의 글이라도 남겨야겠다. 2000. 1. 14


어쩌면 그리도 여러 종류의 새들이 한꺼번에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지! 성당에서 미사 후에 새소리를 들으며 수녀원으로 오는 길은 황홀하기만 하다. 한동안 소식 없어 궁금했던 소설가 최인호 베드로님이 전화를 주어 반가웠던 마음. 2010. 7. 8


“요즈음 수녀님이 주신 앙드레 가뇽의 음악을 자주 듣습니다... ‘아베 마리아’를 들으면서 기도하고 글을 쓰실 때 수녀님의 마음에 스며드는 이 음률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 하느님께서 수녀님을 잘 지켜 주시리라 믿지만 수녀님께서도 마음 청안하게 지니시고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건강해지세요.”

도종환 시인의 반가운 메일... 2010. 7. 26


요즘은 내가 정신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 건망증이 부쩍 심해진 것 같네. 주민등록증이며 손목시계며 물건들을 어디에 두었는지 도무지 모르겠으니 어쩌나. ‘여기 두면 나중에 찾기가 힘들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한 것까지도 기억을 하면서 막상 그 장소는 모르겠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2010. 11. 28


오늘 저녁기도를 마치고 유안셀모 아저씨의 퇴임식을 하는데 그분과 특별히 개인적인 친분을 쌓은 것도 아니건만 어찌나 눈물이 많이 나던지! 35년이나 수녀원 농장을 정말 열심히 관리해 주던 분. 나는 별도로 그분에게 감사의 카드를 적어드렸는데 그것을 퇴임식 중에 젊은 수녀가 대독을 하여 깜짝 놀랐네. 나이 들어도 이별의 슬픔은 감당이 안 되니 걱정이다. 2010. 12. 29


제4장 <누군가를 위한 기도_ 기도일기>에는 군인들을 위한 기도, 사제를 위한 기도, 교사를 위한 기도 등 주제를 가진 기도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어느 날 병원에서_ 의사 선생님께’에는 암 치료를 위해 오간 병원의 의사에게 오히려 그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글 속에서 육체적인 병의 치료를 받으면서 마음의 치유를 전할 수 있는 그 넉넉함을 배우게 된다.


사실 이 병원에 와서 선생님의 환자가 되기 전까지는 저도 의사들의 삶에 대체적으로 무심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밖에선 평범하게 지내다가도 병원에 들어와 흰 가운을 입는 그 순간부터 잠시도 쉴 틈 없이 긴장하며 깨어 있는 가운데 많은 환자들을 돌보아야 하고, 그들의 보호자들과도 상담을 해야 하며, 때론 잘못한 것도 없이 원망을 들어야 하는 선생님의 막중한 소임을 위해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어느 날 병원에서_ 의사 선생님께’에서


또다시 가는 한 해,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하렵니다.

‘참 고마워요. 힘들어도 아름다운 일 년이었어요!’

또다시 오는 한 해,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하렵니다.

‘참 고마워요. 또 하루하루 살아갈 새 힘을 당신이 주실 거지요?’

- ‘감사하면 할수록’에서


제5장 <시간의 마디에서_ 성서묵상일기>에는 이해인 수녀가 1998년~1999년 두 해에 걸쳐 매일 적어 나간 묵상일기를 발췌해 실었다. 수도자로서의 이해인 수녀의 모습과 그의 간구를 여과 없이 느끼게 해준다.


1999년 4월 18일 일

주님.

세상 떠나는 순간까지 늘 감동할 수 있는 뜨거운 마음을 지니고 싶습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사람들과의 만남 안에서 당신을 발견하고 그 사이에 사랑의 식탁이 차려질 수 있게 하소서.


1999년 6월 26일 토

주님, 제게까지 몸과 마음의 아픔을 호소해 오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편지로, 전화로, 방문으로...

아프다, 아프다 외치는 이들...

“나를 잊은 건 아니지요? 수녀님마저 저를 잊으면 저는 설 수가 없어요.”라고 호소해 오는 이들에게 저는 “내가 가서 고쳐 주마.” 할 수도 없고...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 주십시오!


1999년 7월 26일 월

땅에 점같이 작은 꽃씨를 심어 보니 알겠습니다.

조그만 것, 힘없이 약해 보이는 것의 그 대단한 위력을...

작은 것이 작은 것이 아님을...

매일 매 순간을 ‘작은 일에 대한 충실’로 살게 하소서!


1999년 8월 7일 토

“아, 이 시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마태오 17:17)

오늘날에도 이렇게 탄식하실 주님, 어찌하면 우리가 바로 설 수 있을까요? 윤리 도덕이 무너지고, 선과 악이 뒤바뀌고, 위아래가 없어지고, 정직함이 사라지고, 온통 혼란과 무질서가 가득한 시대에서 정녕 우리가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선이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제6장 <그리움은 꽃이 되어_ 추모일기>에는 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다간 우리 시대의 어른들과 이해인 수녀가 맺은 우정과 그리움, 애틋함의 무늬가 새겨진 추모의 글들이 담겨 있다. 수필가 피천득, 김수환 추기경, 화가 김점선, 장영희 교수, <십대들의 쪽지> 발행인 김형모, 법정 스님, 이태석 신부, 작가 박완서... “미리 생각하는 이별은 오늘의 길을 더 열심히 가게 한다”고 애써 슬픔을 감추고 존경하는 분과 다정했던 벗을 떠나보내며 쓴 글들은 곁들인 사진과 더불어 읽는 이들의 마음을 울린다.


“수녀도 그럼 항암이라는 걸 하나?”

그래서 내가 “항암만 합니까. 방사선도 하는데.” 하고 대답했더니 추기경님은 무언가 가만히 생각하시는 듯했다. 나는 추기경님이 주님을 위해서 고통을 참아라, 그런 말씀을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대단한 고위 성직자이고 덕이 깊은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주님이라든가 신앙, 거룩함, 기도 같은 것이 아니었다. 추기경님은 연민의 정 가득한 눈빛으로 이렇게 딱 한 마디 하셨다.

“그래? 대단하다, 수녀.”

그 한 마디, 인간적인 위로를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 그 이후로 나는 힘든 치료를 하는 이들에게 종종 “대단하세요, 정말!” 하며 추기경님의 그 표현을 흉내 내어 보기도 한다.

- ‘그리운 사랑의 바보 김수환 추기경님께’에서


내 치맛자락 꼭 붙들고 천당 가겠다더니 그렇게 먼저 가면 어떡해요. 하늘나라에서도 꼭 한 반 하자고 했으니 내가 도착할 때까지 부디 잘 지내길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서 고운 그림을 그리는 별이 되세요.

- ‘하늘나라에서도 꼭 한 반 하자고?_ 김점선 화가 1주기에 부치는 편지’에서


문학은 삶에 대한 감사함이라고 일러 주신 선생님, 꿈에서라도 다시 뵙고 싶은 그리운 선생님, 선생님을 보내 드리는 고별식에 참석하고 하관예절까지 다 지켜보고 왔는데도 이 세상에 안 계시다는 것이 실감되질 않네요. 제 방에 수북이 쌓아 둔 각종 일간지에 선생님의 웃는 얼굴이 실린 기사를 보면서도 “이분이 왜 여기 계실까?” 의아합니다. 추억이 많은 그만큼 눈물도 그치지가 않습니다.

- ‘많은 추억은 많이 울게 하네요!_ 박완서 선생님을 그리며’에서

 

 

맨 뒤쪽에 담긴 시 ‘여정’에는 이해인 수녀가 투병의 고통 속에도 놓지 않은 삶에 대한 기쁨과 감사 그리고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이 담겨 있어 뭉클한 따뜻함을 안고 책장을 덮게 해준다.


    여정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순례자

    강원도의 높은 산과

    낮은 호숫가 사이에 태어났으니

    나의 여정은 하루하루

    산을 오르는 것과 같았고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았네

    지금은

    내 몸이 많이 아파

    삶이 더욱 무거워졌지만

    내 마음은

    산으로 가는 바람처럼

    호수 위를 나르는 흰 새처럼

    가볍기만 하네

    세상 여정 마치기 전

    꼭 한 번 말하리라

    길 위에서 만났던 모든 이에게

    가만히 손 흔들며 말하리라

    많이 울어야 할 순간들도

    사랑으로 받아 안아

    행복했다고

    고마웠다고

    아름다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