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를 다시 읽으며
1821.11.11~188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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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는 ‘모든 인간’이 다 들어 있다. 무오류의 고결하고도 완성된 인간이 있는가 하면 파렴치범에 악한도 있다. 인간의 추악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삼소노프 같은 사람과 그 반대의 위엄 있는 고뇌를 보여주는 조시마 장로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공존한다. 물론 진정으로 이 위대한 작가의 수많은 걸작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들은 그 중간에서 끝없이 서성이고 방황하는 인물들이다.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이며 ‘상처받은 사람들’인 그들은 무시무시한 ‘악령’에 사로잡힌다. 끝내 ‘죄와 벌’의 형극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나 그들이 제 영혼을 저당 잡혀가면서 끌어안고자 했던 최후의 진실과 윤리의식은 지금도 대문호나 걸작 같은 명단의 맨 윗자리에 놓여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1월 11일 빼빼로 데이에 태어났다^~~
이 대작가의 수많은 걸작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과 그 행동을 고르는 일은 매우 행복한 고통이다. 각 권마다 수백 쪽에 달하고 ‘~스키’나 ‘~로프’로 끝나는 대다수의 인물들, 더욱이 그들이 애칭이나 아칭으로 불리기도 하고, 작품들 속에 끝없이 등장하는 돈과 연관하여 19세기 중엽의 러시아 물가 사정도 감안해야 하는데, 그래서 두꺼운 책들을 다시 꺼내서 살펴봐야 하는 행복한 노동이 되는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도 선생 기념상)
그렇게 다시 꺼내보면 이 작가의 걸작들은 평생을 두고 두번 세번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예컨대 그의 걸작들 중에서 비교적 사건 전개가 명료하고 주요 인물도 대여섯 명으로 압축할 수 있는 <죄와 벌>을 예로 들면, 누구나 중고교 시절에는 이 작품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비범한 결행과 지독한 자기모멸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제정 러시아 말기의 우울한 인물들은 라스콜리니코프의 뒷배경으로 스산하게 늘어서 있다. 그런데 나이 들어 다시 읽으면 라스콜리니코프와 논쟁을 벌이는 그들이 또렷하게 떠오르고 심지어는 이 주인공을 법리적으로나 상황적으로 코너로 몰아붙이는 예심판사 포르피리에게도 깊은 관심이 끌리게 된다.
이번에 다시 훑어보면서 이 문제작의 핵심 인물은 어쩌면 라스콜리니프가 아니라 스비드리가이로프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물론 이전부터 평론가들은 이 인물에 대해 집중 조명을 해왔다).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노파를 살해한 라스콜리니코프에 의하여 전개된다.
작품의 3부에서 그는 자신이 쓴 ‘범죄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소재로 하여 예심판사 포르피리와의 밑도 끝도 없는 논쟁을 거듭하면서 어느 정도까지 의심을 받고 있는지 확인을 한다. 그때까지는 확증을 갖지 못한 포르피리는 라스콜리니코프를 보내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라스콜리니코프는 예심판사의 공격을 물리친 자신의 논리와 비범함을 다시 한번 되뇌이는데 그 순간 누군가 나타나 “네가 범인이다”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집으로 돌아온 라스콜리니코프는 혹시 자신이 실수한 대목이 없나 골똘히 생각하고 또한 온몸을 사로잡는 두려움에 떨면서 차라리 자수를 해버릴까 전전긍긍하다가 잠이 드는데 문득 깨고 보니 스비드리가이로프가 서 있다. 스미드리가이로프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신과 닮은 점이 너무나 많다면서 이야기를 건네기 시작하고 그 무렵부터 작품의 후반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프가 살았던 곳으로 묘사된 5층 하숙집. 실제로 도 선생이 살던 곳이다.
<죄와 벌>은, 작품의 초반부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그 어떤 공포 추리소설을 능가하는 소름 돋는 긴장으로 충만해 있고 후반부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가 대지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종결되는 고결한 의식으로 충만해 있다. 그 사이, 그러니까 죄와 벌 사이, 혹은 끔찍한 살해와 간절한 구원의 기도 사이에 스비드리가이로프가 있다.
그는 마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맏형 드리트리가 “나쁜 짓을 저질렀지만 비열한은 아니오!” 하면서 절규한 것처럼, 자기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시커먼 죄의식을 치유하기 위해 권총자살을 택한다. 그것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제정 러시아 말기의 청년들이 겪었던 무시할 수 없는 본질적인 충동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그 대목을 아래에 옮긴다. 스비드리가이로프가 권총자살을 결행하기 위해 ‘네바 강을 향해 미끄러운 진흙투성이가 된 나무판자를 깐 보도를 걷기’ 시작한 다음의 대목이다. ‘모피 외투를 입은 주정뱅이가 보도 위에 죽은 듯이 자빠져 자고’ 있는 곳에 이르러 스비드리가이로프는 권총을 꺼내든다. 그때 회색 군인 외투를 입고 아킬레스 식 헬멧을 쓴 ‘어두운 그늘이 감도는 영원한 비애 같은 것’이 감도는 관헌이 제지한다. (도선생 무덤)
“여긴 당신이 올 곳이 못 돼요!”
“난 외국으로 가려고 왔소.”
“외국으로?”
“그렇소. 미국으로 가려는 거요.”
“미국으로?”
스비드리가이로프가 권총을 끄집어내어 노리쇠를 젖히니 아킬레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건 또 뭐요? 여긴 장난하는 곳이 아니오!”
“왜, 여기선 안 된다는 거요?”
“여긴 그런 곳이 아니라니까요!”
“염려 마시오.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오. 여긴 정말 좋은 자리거든! 안성맞춤이야! 누가 묻거든 이렇게 대답해주시오. 미국으로 갔다고 말이오.”
그는 권총을 오른쪽 관자놀이에 들이댔다.
“여보시오, 잠깐만! 여긴 안 돼요! 여긴 그런 짓을 하는 곳이 아니라니깐!”
아킬레스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떨었다.
스비드리가이로프는 방아쇠를 당겼다.
이 대목에 대하여 철학자 김용규는 <한겨레>에 연재한 ‘문학 속 철학산책’의 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사회주의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지었다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유주의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짓는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기 부인을 살해하고, 하인을 학대하여 자살하게 하고, 14살 어린 소녀를 능욕하여 자살하게 했다. 그의 범죄는 개인적인 정욕과 쾌락에서 나왔다. 범죄 동기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와 다르지만 원인은 같다. 그에게도 욕망과 쾌락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이 있었다.
결국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하다. 개인적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든 사회적 이익과 개혁을 위해서든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自慢)이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지옥보다 더 끔찍한 지옥에 갇힌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라스콜리니코프는 차라리 수용소에 가려고 자수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권총으로 제 머리를 쏜다.
그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얇은 편에 속하는 <죄와 벌>이 이러할진대 <악령>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가면 므이슈킨, 스타브로킨, 이반 같은 인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악령>의 앞 대목을 차지하는 베르호벤스키 같은 인물조차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새롭게 읽혀진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도스토에프스키의 작품 중에서도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이다. 대심문관은 무신론자인 이반이 쓴 극시 ‘대심문관’에 나오는 대심문관이다. 막내 알료샤는 형 이반의 독촉에 못 이겨 그가 쓴 이 극시를 읽게 된다. 그러면서 이 소설은 갑자기 19세기 중엽에서 이단 심문 종교재판이 지배했던 스페인 세비야의 공포스러운 15세기로 돌아간다. 가톨릭 이단자들을 화형시킨 광장에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임을 깨닫지만 대심문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젊은 날의 도 선생. "천국은 우리 각자 안에 숨어 있습니다. 물론 지금 내 안에도 숨어있죠. 이제 제가 원하기만 하면, 내일이라도 천국은 나를 위해 눈앞에 나타날 것이며 일생 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 입니다." )
대심문관과 예수 그리스도의 상면은 곧 무신론자이자 혁명적 허무주의자인 이반과 그리스 정교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체득하는 알료샤의 현실적 논쟁으로 확대된다는 점만 언급하기로 한다. 그 논쟁의 마무리에서도 미국이 등장한다. 물론 여기서 미국은 <죄와 벌>의 스비드리가이로프가 외쳤던 그런 의미의 미국이다. 이반은 말한다.
“얘, 알료샤.”
이반은 확고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내가 만일 끈적끈적한 새 잎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널 상기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할 수 있을 거야. 그래, 이런 얘긴 이제 그만두기로 하자. 뭣하면 내 사랑의 고백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이만 헤어지자. 너는 오른쪽으로 가고 나는 왼쪽으로 가고, 자 이젠 다 끝났다. 다 끝났어. 만약 내가 내일 떠나지 않고 (아마 틀림없이 떠날 거로 생각하지만) 어쩌다 다시 또 너를 만나더라도 이런 문제에 대해선 아무 말도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정말 이것만은 신신 당부해 둔다. 그리고 드미뜨리 형에 대해서도 제발 아무 말 말아 다오.”
그는 갑자기 짜증스런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속 시원히 다 털어놓았어. 그렇잖니? 그건 그렇고 나도 너한테 한 가지 약속해 두겠다. 내가 서른 살이 되어 ‘잔을 내동댕이치고’ 싶어졌을 때, 나는 네가 어디 있건 또 한번 너와 얘기하러 찾아오겠다. 비록 미국에서라도 찾아올 테니 그리 알아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도스토예프스키의 묘지명에 적힌 <요한복음> 12장 24절의 성경 구절은 생존 당시 마지막 작품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제였다.
도스토예스프키의 소설은 평생에 걸쳐 거듭 읽고 또 읽게 되는 작품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읽을 때마다 눈이 끌리는 대목이 다르고 관심 쏠리는 인물이 바뀌게 된다. 선과 악, 죄와 벌, 신과 인간...
<죄와 벌>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를 새롭게 읽어보시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우선 <악령>을 권하고 싶다.
악령 l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l 김연경 옮김ㅣ열린책들
신약성서에 악령이 씐 돼지 무리가 호수에 뛰어들어 빠져죽는 기록이 있는데, 이 작품은 무신론 혁명사상을 그 ‘악령’으로 보고, 그것에 이끌린 사람들의 파멸을 묘사하려고 한 것으로서 실재한 아나키스트 혁명가 네차예프가 전향자 이바노프를 참살한 사건에서 취재하였다. 소설은 이 사건을 축으로 하여 도스토에프스키가 창조한 가장 불가해한 인물 스타브로긴, 자살 필연론자 키릴로프, 독자적인 사회주의 미래상을 말하는 시가료프, 이상주의적인 리버럴리스트 베르호벤스키, 투르게네프를 희화화한 작가 카르마지노프 등 착잡한 등장인물들 사이의 사상적, 정신적 드라마로 전개된다. 대학 1년 때 황동규 선생이 교양과정 영어 수업에서 영문학 작가 작품이 아니라 생뚱맞게 <악령>을 레포트로 제출하라 하셨네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도스토예스프키 문학의 총화라 할 이 작품은 그 형제들뿐만 아니라 그 밖의 인물들로 엮이는 이야기는 각각 독립된 장편일 정도이다. 우선 조시마 장로는 이 작품의 근원 설화와 같은 역할로 그 어떤 기적이 신비감 없이 ‘악취를 풍기며’ 죽어가며, 사생아인 스메르쟈코프는 ‘현명한 자와의 대화는 즐겁다’는 기이한 변술로 그 현명한 자, 곧 둘째 아들 이반의 사상을 실천한다. 스메르쟈코프를 낳게 되는 동네의 미친 여자가 폭풍우 치는 밤에 자신을 범한 표도르의 저택 담장을 넘는 장면은 현대의 비극을 알리는 전조로 읽힌다.
해방 이후 이 소설의 수많은 번역판본이 나왔다. 나는 정음사판 전집으로 읽었다. 러시아어 원본을 바탕으로 하되 영역본과 일역본을 참조했다고 한다. 원역이든 중역이든 아무튼 그 무렵의 도스토예프스키 번역본에는 의고체(擬古體) 단어와 문장이 많았고 개인적으로는 그에 대한 향수가 짙게 남아 있다. 그러다 새로운 전집들이 나오면서 요즘 문장 감각으로 번역되었다. 그 대표적인 작업이 열린책들의 전집이다. 에피소드 하나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번역본 회수 사건. 지난 2001년 1월에 이 전집을 낸 후 오자와 오역 문제가 크게 일자 출판사측은 우선 오자 및 탈자들을 모아 홈페이지에 정오표를 만들어 올렸고 개정판 작업에 들어갔다. 독자와의 약속 늑장 등 이 과정에서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아무튼 광고비 포함 4억 6천여만 원을 들인 이 전집을 거의 전면적으로 개정한 열린책들의 의지와 실천은 출판계의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열린책들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도 전면 재번역(이윤기 역) 개정판을 낸 바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 석영중 지음 | 예담
2007년 여름에 이 책의 저자 석영중이 홍대 앞 북카페에서 ‘저자와의 만남’ 같은 행사를 가졌다. <한겨레신문>의 고명섭 기자가 진행한 이 행사에서 저자는 시종일관 유려한 어투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를 설명해냈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가 집중한 것은 ‘돈’이었다. 그는 돈 때문에 수많은 작품을 써야 했지만, 여기서 ‘돈’은 단순히 ‘원고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많은 걸작의 한복판에 돈이 얽혀 있는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유산이나 증여나 대부금 같은 얘기가 끝없이 나온다. 그것이 모든 인물들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저자에 따르면, 이 소설은 ‘3000루블에 의한 3000루블을 위한 3000루블’의 소설이다. 3000루블은 요즘의 한화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6천만 원 안팎이 되는데, 작품 속에서 맏형 드리트리는 그 중 절반가량의 돈을 가슴 속의 부적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사람들과 격한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제 가슴을 치면서 “이 속에 모든 문제가 다 들어 있다”고 절규한다. 독자는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 심오한 영혼의 문제가 ‘가슴’ 속에 다 들어있다는 고백으로 읽게 된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면서 드미트리는 현물의 ‘돈’ 얘기를 꺼낸다. 그러자 소설은 달리 읽히게 된다. 이 소설에서 3000루블에 관하여 정확히 191번 언급되고 그밖에도 돈에 관한 언급이 약 300번 정도 있다고 한다. 저자가 일일이 세어보았다고 한다. E. H. 카의 평전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그 거대한 산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요긴한 안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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