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김광규 시집 <하루 또 하루>에서

라라와복래 2011. 3. 28. 06:32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한 이래, 생활 세계 속의 현실 체험을 바탕으로 ‘일상 시’의 영역을 꾸준히 개척해온 시인 김광규의 열 번째 시집 <하루 또 하루>는 자연으로부터 얻은 인상, 이제껏 사람들과 맺어온 관계에 대한 반성, 지나간 세월에 대한 회고, 여행지에서의 깨달음, 그리고 별세한 지인들에게 보내는 추모의 내용 등이 담겼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90_2011-03-24

 

    나 홀로 집에


    복실이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창틀에 앞발 올려놓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집 안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나 보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덕분에

    밀린 글쓰기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무슨 기척이 있어

    밖으로 눈을 돌리니

    밤하늘에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창 안을 들여다본다

    모두들 떠나가고

    나 홀로 집에 남았지만

    혼자는 아닌 셈이다


    교대역에서


    3호선 교대역에서 2호선 전철을

    갈아타려면 환승객들 북적대는 지하

    통행로와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르내려야 한다 바로 그 와중에서

    그와 마주쳤다 반세기 만이었다

    머리만 세었을 뿐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 바쁜 길이라 잠깐

    악수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와 나는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나뉨


    소형 임대아파트 주민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오고 가지 못하도록

    주상복합 고층 아파트 입주자들이

    통로를 막고

    길에 철조망을 쳤다

    그렇다

    우리는 옛부터 나누어진 겨레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다

 

많은 비평문에서 언급되었듯 김광규의 시는 쉽다. 이것이 쉽게 씌어진 시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김광규의 시는 외적 평이함 안에 내적 비의가 담겨 팽팽한 긴장을 갖는 시이기에 아프게 쓴 시이고, 또한 아프게 읽히는 시이다. 시인은 담담하게 말한다, “생활을 하듯 시를 쓰고 있을 뿐이다”라고. 생활 세계와 현실에 대한 열린 태도로 삶에 밀착해 시를 써내려가며, 서정의 정신과 시적 언어의 자유로움을 이어 가장 진실하고 투명한 시를 써내는 시인 김광규. 이제, ‘하루 또 하루’ 살아가는 시인의 삶과 그 속의 통찰이 고스란히 담긴 예순일곱 편의 시가 독자들을 향하기 위해 헌 신발 끈을 묶는다.


 

 

 

 

뒤표지 시인의 글


왼쪽과 오른쪽의 대칭 구조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과 마음에 관하여 나는 30여 년 전에 ‘도다리를 먹으며’라는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지금도 여기저기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는 상당히 보편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그런데 당시에 내가 지니고 있던 좌우 상칭 개념이 나이 들면서 차츰 불균형 양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모든 사물을 관찰하고 끊임없는 독서와 집필의 도구로 사용해 온 두 눈이 몇 년 전부터 그 자동 기능에 이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왼쪽 눈의 시력이 0.2로 떨어져 버렸다. 오른쪽 눈의 시력은 아직 1.0이지만, 짝눈으로는 제대로 보기 힘들다. 이제는 사전을 들추어 볼 때, 확대경을 찾게 되고, 도무지 잔글씨로 인쇄된 책은 읽기 어렵게 되었다.


재작년에는 왼쪽 무릎을 다쳐서 고생했다. 개를 데리고 뒷동산으로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오솔길을 내려오는데, 숲에서 갑자기 꿩병아리 몇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 순간 놀란 개가 날쌔게 그놈들을 쫓아가면서, 미처 목줄을 놓지 못한 주인을 넘어뜨린 것이다. 뼈나 인대를 상하지 않고, 무릎 근육만 다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뒤이어 2주일 동안 반깁스를 하고 다리를 절면서 해외여행을 다녀오느라고 큰 곤욕을 치렀다.


왼쪽 눈과 왼쪽 다리가 이렇게 되자, 몸 전체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느낌이다. ‘도다리를 먹으며’시에서 두 눈이 오른쪽으로 몰려 붙은 “우 도다리”를 비웃던 서정적 자아가 스스로 도다리처럼 되어버린 셈이다. 좌우 균형의 유지가 생득적으로 당연한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인간의 뇌도 좌우로 갈라져 있어, 그 맡은 기능이 서로 다르다고 한다. 논리와 계량에 어둡고, 고유명사나 보통명사 들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을 보면, 나의 뇌도 왼쪽이 시원찮은 모양이다. 오른쪽 뇌가 창조적 감성을 관장한다니, 그래도 천행으로 여겨야 할까. 하지만 왼쪽이 약해지면, 오른쪽만 계속 혹사하게 되어, 결국 양쪽을 모두 못쓰게 되기 쉽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역시 균형을 잃지 않는 일이다.